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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미술시장에 흘러 넘친 건 자본주의 욕망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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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C 광통교 그림가게부터 근대미술시장 완성까지 70년사 검토

개항 이후 외국인 수요자와 화가, 화상들의 역동적 상호작용 ‘생생’


한겨레

묄렌도르프가 구입한 조중묵의 〈미인도〉(1883),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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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의 탄생

손영옥 지음/푸른역사·2만7900원

영국 런던에서 발행한 주간지 <더 그래픽> 1909년 12월4일치에 한 삽화가 실렸다. 사파리 헬멧 같은 모자를 쓴 서양 남자가 조선백자를 손에 얹고 조선인 상인들과 흥정하는 그림이었다. 조선 미술품과 서양인의 만남을 상징하는 이 그림에서 보듯, 개항은 한국 미술시장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전근대적 미술시장이 근대적 자본주의 방식으로 이행하면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이 ‘미술’로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미술시장의 탄생: 광통교 서화사에서 백화점 갤러리까지>는 한국의 근대적 미술시장의 탄생부터 완성까지 70년사를 통괄한다. 1876년 처음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해방에 이르는 시간 동안 화랑과 경매 발전사를 양축으로 하여 서화와 고미술품 생산과 거래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다룬 보기 드문 미술품 거래의 역사다. 중앙일간지 미술·문화재 전문기자로 일하면서 올해 한 신문사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으로 당선(필명 손정)되기도 한 지은이 손영옥은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 연구’를 썼고 이를 뼈대로 책을 완성했다. 이번 책에서는 특히 개항 뒤 한반도를 찾은 서구인 등 미술품 수요자와 그들에게 자극받은 화가, 그리고 중개자인 화상 들의 자본주의적 욕망 추구와 상호관계를 통해 한국의 근대적 미술 시장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역동적이면서도 실감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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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8~19세기 전반 한양의 ‘광통교 그림 가게’. 이곳은 자생적 화랑과 근대적 직업화가의 맹아였다. 당시 무명의 직업화가들은 사람들이 집안에 복을 불러들일 생각으로 붙이던 길상화(吉祥畫)를 그려 팔았다. 지은이는 그 뒤 근대적 미술시장을 형성한 행위자들의 상업적 태도에 눈길을 준다. 도화서 제도가 폐지되고 화가들이 생존 경쟁에 내몰릴 때, 개항장과 대도시에 출현한 서양인들은 본국의 요구에 따라 풍속화 등을 실어 날랐다. 대한제국기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1848~1901), 선교사이자 의사이며 외교관이었던 미국인 호러스 앨런(1858~1932)은 당시 미술시장의 대표적인 컬렉터였다. 이 ‘큰손’들은 개인 취향이라기보다 박물관이 준 가이드라인에 따라 머리빗부터 그림까지 다양한 품목을 수집했다.

개항기 서양인들은 ‘미지의 신선한 나라’의 일상을 화폭에 옮긴 ‘풍속화’를 선호했다. 특히 기산 김준근(생몰년도 미상)의 풍속화는 10여년 간 1200여점이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며 현재 한국보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외국에 더 많이 소장되어있다. 그의 그림은 형벌, 제사, 장례 풍습 등 서양인들의 관심을 끄는 장면들이 많았다.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도화서 화원 조중묵(생몰년도 미상)은 철종 어진(1852)과 고종 어진(1872) 제작 때 책임을 맡은 화사였다. 그가 그린 <미인도>는 묄렌도르프가 1883년 주문해 구입한 것인데, 저고리와 치마 등의 주름과 입체감에서 서양화의 느낌이 강하다. 직업 화가들은 서양인들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그려주었고 중개 상인들은 너도나도 죄의식 없이 도굴한 고려자기를 헐값에 서양인들에게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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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가운데)와 아사카와 노리타카(맨 왼쪽)가 1922년 서울에서 개최한 조선도자전람회(<매일신보> 1922년 10월6일치).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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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한국의 미술시장을 장악한 이들은 일본인이었다.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 이전인 1905년부터 1919년까지, 일본인들은 도굴된 고려자기에 눈독을 들였다. ‘고려청자광’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조선에 머무른 1906년께 고려자기는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수집 열기는 몇년 후 절정에 달했다. 1909년 신문에는 옛 서화와 서책 따위를 파는 행위가 나라를 파는 것이나 같다며 꾸짖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1912~13년께 고려청자 수집 열기는 “악머구리 떼 모양”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왕가박물관(1908~1945)은 한반도 최초의 근대 박물관으로 일제통감부 시절 창경궁 안에 만들어졌다. 이곳과 조선총독부박물관(1915~1945)을 통로 삼아 일본 골동상들은 도자기 납품 등 미술시장을 장악했다. 1911년 무렵 서울 인사동에 형성되었던 한국인 골동상은 방물가게나 잡화가게에 가까운 수준으로 영세했기에 서양인들은 일본인 골동상을 더 신뢰했다. 국권 침탈 이후 서울 북촌 양반동네에서 흘러나온 조선 고서화는 일본인 수중에 속속 들어갔다. 이에 지은이는 “한 나라의 몰락이 미술품 수장가 교체현상을 불러온 것”이라고 담담하면서도 한탄조로 분석한다. 이왕가박물관의 실세였던 일본인 운영 주체들은 친일파로 지탄받는 조선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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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이 인수한 개스비 컬렉션에 포함된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12세기 중기, 국보 제270호), 간송미술관 소장. 푸른역사 제공


그밖에도 책은 근대적 미술시장이 본격화한 1920년대 ‘전람회의 시대’, 자본주의의 영향이 확대된 1930년대 이후 ‘모던의 시대’에 나타난 한국의 갤러리를 조명한다. 1930년대 미술시장에서 두드러진 점은 수요자들에게 투자심리가 나타난 것이다. 미술품을 영구 소장하는 애호품이 아니라 차익을 실현하는 투자상품으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는 미술품 수요자들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고 미술품이 투자 상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소장품을 되파는 경매 같은 2차 시장도 1930년대 후반 들어 활기를 띠었으며 한국인 수장가와 중개상도 미술시장 전면에 등장했다. 제국주의를 꿈꾸던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경제체제로 들어갔지만 경성미술구락부가 올린 1941년 매상액은 전해에 견줘 1.7배나 늘었다. 일본의 식민지 수탈이 극성을 이루던 시기, 대중의 핍진한 삶과 달리 상류층의 미술품 향유 문화 붐을 타고 미술시장은 급성장했다.

개항 이후 70년간 미술시장에 출렁이며 흘러 넘친 건 단지 미술품, 미술시장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이었다고 지은이는 밝힌다. 고려자기에 열광하던 식민지 통치층과 상류층, 발빠르게 시장을 선점했던 서양인과 일본인 골동상, 그리고 민족문화재의 반출을 막으려 한 간송 전형필 등 나라 안팎의 컬렉터들과 1930년대 경쟁하듯 들어선 백화점 갤러리에 내걸린 미술품들…. 한국 근대 미술시장사를 표방한 이 책이 결국 향한 곳은 미술로 보는, 복잡하고 시린 한국 근현대사일지도 모르겠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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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조선 후기, 국보 제107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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