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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우리 사회를 ‘거대한 n번방’으로 만드는 언론 보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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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한겨레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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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괜찮았는데 갑자기 너무 힘이 들어요. 모두가 괴물 같아 보여요.”

지난 6일 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4)씨의 성착취 피해자인 ㄱ씨가 긴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의 시작인 닉네임 ‘갓갓’의 엔(n)번방을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각종 성착취방 링크를 공유했던 ‘고담방’ 운영자 전아무개(38·닉네임 ‘와치맨’)씨의 재판이 있던 날이었다. 박사방과 엔번방 피의자들이 속속 검찰과 법원에 넘겨지면서 피의자의 주장을 여과없이 싣거나 피해자의 신원을 특정하는 보도들이 나오자, 용기를 내어 범죄를 알렸던 ㄱ씨는 “너무 허탈하다”고 했다.

ㄱ씨는 요즘 박사방 사건과 관련된 기사들을 매일 검색해본다. 혹시라도 자신의 신원을 특정할 만한 기사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오지 않을지 걱정돼서다. 얼마 전 피해자들 가운데 연예인 등도 포함됐다는 기사가 ‘단독’ 문패를 달고 경쟁적으로 보도됐을 때 ㄱ씨는 “한바탕 또 울었다”고 했다.

가해자들을 고소하고 싶다던 ㄱ씨가 아직 고소를 결심하지 못한 건, 수만명에 이르는 공범들에게 자신의 신원이 노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성착취 범죄를 고발해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뽑겠다’며 달려드는 일부 언론들이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 최소한의 윤리를 잃은 언론 보도는 ㄱ씨를 다시 머뭇거리게 하고 있다. 피해자의 신상을 도구 삼아 성착취를 일삼은 엔번방 사건 가해자들이 남긴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피해자들이 다시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언론 보도는 우리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엔번방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텔레그램 비밀방에서 신상 유출과 성착취물 유포라는 잔혹한 경험을 한 피해자들에게 이런 보도는 범죄로 인해 겪은 피해를 거듭 상기시켜 주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피해자들이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신고마저 꺼리게 되면, 결국 피의자의 추가 범죄 수사도 어려워진다. 범죄를 추적하겠다고 나선 언론이 되레 훼방꾼 노릇을 하고 있다.

최근 일부 언론 때문에 직업이 특정된 한 피해자의 지인이 이런 보도에 대해 법적인 조처를 취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 언론에 형사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겠지만, 명예훼손 등 민사소송이 가능하다는 기자의 답에 그는 절망했다.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는 보도인데 처벌할 방법이 없다고요?” 그의 말은 기자로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피해자의 ‘생존권’에 앞서는 국민의 알권리는 없다.

한겨레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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