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
'그놈'이 나타났다. 무성한 소문과 철저한 은닉술에 점점 실체가 부풀려지던 'n번방'의 수장, '박사' 조주빈이 스스로를 "악마"라 칭하며 포토라인에 섰다. 그리고 그날은 방송 제작진에게도 긴 하루의 시작이 됐다.
'박사' 조주빈 사건은 검거 소식부터 제작진에겐 큰 숙제를 안겼다. 먼저 그가 소셜미디어에서 사람을 모아 저질렀다는 범죄 혐의는, 모르는 사람에겐 현실감 제로(0)인 '남의 일'이고, 아는 사람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성범죄'였다. 이 두 얼굴을 가진 용의자를 어떻게 시청자에게 설명할지부터가 큰 걱정이었다. 성범죄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심의 기준을 위반하는 용어가 난무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피해자 중엔 다수의 미성년자가 포함돼 있어, 2차 피해를 막으면서도 해악은 알릴 지혜가 필요했다. 제작진은 방송 원고를 몇 번씩 곱씹어 살펴보며 표현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화면 처리도 큰 고민이었다. 일단 '박사'가 유포했다는 영상은 단 한 컷도 쓸 수 없었다. 자료 화면도 어설픈 모자이크가 오히려 상상력을 부추길 우려가 있어 사용하지 못한다. 결국 쓸 수 있는 영상이라곤 어두컴컴한 방에서 키보드를 치는 재연 화면밖엔 없었다. 이때 조주빈의 신상 공개가 결정됐다. 그림 걱정에 고민이 깊던 제작진엔 반전의 순간이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용의자 얼굴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번의 반전이 제작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토라인에 선 조주빈이 느닷없이 유명인사 3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들마저도 "왜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오지?" 어리둥절했을 만큼 돌발 상황이었다. 다시 제작진은 혼돈에 빠졌고, 경찰 출입기자들도 긴급 취재에 들어갔다. 결국 경찰이 "조주빈이 세 사람에게 사기 쳤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소동은 일단락됐지만, 제작진에겐 또 한 번 사기 피해자들의 해명을 방송에 반영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어둠 뒤에 숨어 있던 자칭 '악마'의 등장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를 보낸 제작진…. 앞으로 또 얼굴을 바꿔 등장할 이런 신종 범죄를 어떤 방식으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것인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 하루였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