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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세상읽기] n번방의 죄와 벌 / 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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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책상, 의자, 침대, 노트북, 벽 등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부쉈다가 테이프를 발랐다가를 반복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 애는 매일매일 죽으려고 했다가 살아보려고 했다가 또 죽으려고 했다가 다시 살아보려고 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2017년 8월17일에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애는 그해 5월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죽임당해서 그날 마지막 숨이 끊어졌을 뿐입니다.” 2019년 1월30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불법촬영 및 비동의 유포 피해자를 기리는 ‘이름 없는 추모제’에서 피해자 지인이 낭독한 내용이다.

우리 모두는, 평판이 형성되고 정보가 노출되는 디지털 환경에서 산다. 나의 소비 성향, 정치적 지향, 요즈음 고민을 부모는 몰라도 페이스북 친구는 안다. 온라인에서 누군가의 출신 지역과 학교, 가족과 친구를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성범죄는 더 이상 증강현실 속 주머니 괴물이 아니다. ‘피해자들은 여타 성폭력 피해자와 동일한 반응을 보이고 지속적인 공포와 무력감을 경험하며 공황 발작이나 섭식 장애 등의 심리적 피해를 호소한다’는 연구 사례도 있다.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삭제하는 업체 대표는 “지워달라는 요청이 와서 작업을 마치고 전화를 걸 때 가족이 전화를 받고 ‘피해자는 자살했다’는 답변을 듣는 일이 많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의 가해자 ‘박사’는 이 디지털 세상을 최대한 이용했다. ‘박사’가 잡혔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 사실로 밝혀졌다. 성착취 ‘엔(n)번방’ 관련 청와대 청원은 순식간에 100만을 넘겼다. 참혹한 사건은 ‘박사’와 ‘갓갓’ 같은 악마 몇명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범죄로 드러났다. 대화방 참여자가 26만명에 이르고 피해자는 74명, 16명의 미성년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남성문화로 포장되어 흔하고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폭력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피해자들에게 그 숫자는 어떤 느낌일까? 세상은 온통 가해자들을 향한 분노로 들끓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어떨까? 수사기관이 박사와 공모자들을 검거했으니 하루라도 불안을 접을 수 있을까….

26만명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청원에 동의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했다. “나는 형이 확정되기 전 어떠한 형태의 처벌도 타당하지 않다 생각한다. 신상공개와 얼굴공개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명에 동의했다. ‘박사’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지만 동조자들의 이름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이러한 범죄가 그 나이 때 호기심과 실수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썼다. 법의 공백은 ‘박사’를 오래 가두지 못할 수 있다. 청와대와 국회 동의 청원에 의해 ‘텔레그램 엔번방 방지법’으로 만들어진 ‘성폭력처벌법 개정 법률안’은 영상편집으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딥페이크’(인공지능을 이용해 영상의 얼굴을 조작)를 제작·반포하는 행위만을 처벌 대상에 포함하는 데 그쳤다. 실제 디지털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양형기준 강화, 수사 시스템 개선, 국제 공조 수사 관련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50~60대 남성이 주축이 되어 법을 만드는 국회는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 여성의 고통에 둔감하다. 강력사건이 터질 때마다 강호순과 조두순 같은 괴물들을 엄벌에 처하겠다고 발표하는 국가는 강력한 형벌체계를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지, 피해자 구하는 데는 무능하다.

26만명이 낄낄거리며 죄를 지었다. 선량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그들 방에서는 가해 사실을 인증하며 기생했다. 신상정보 공개를 요구한 청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나라가 아이들을 아동 성범죄자들로부터 지켜주지 않을 거라면, 알아서 피할 수라도 있게.” 국가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자력갱생하겠다는 절규다. 당장 벌어질 수 있는 엄중한 범죄 확산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처로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특별법을 만들어 가담자 전원을 처벌해야 한다. 죄가 있으니 벌이 있어야 한다. 이대로 방치하면 여성들은, 피해자들은 매일매일 살아보려 했다가 죽으려 했다가, 그렇게 차근차근 죽어갈 것이다. 피해자가 죽고 가해자가 웃는다면, 이 세상은 그냥 망해도 좋다. #n번방특별법제정

▶[연재]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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