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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원희복의 인물탐구] 소방출신 정치인 오영환 "생명 살리는 정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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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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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출신의 정치참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인이 법을 만들고 예산을 확정하면 공무원이 이를 집행한다. 사법부 출신이 정치하는 경우도 많다. 현직 국회의원 중 판사나 변호사 출신이 얼마나 많은가. 판사·검사·군인·경찰 심지어 교수(교사) 출신 정치인이 다수지만 단 한 명의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한 공직 분야가 있다.

바로 소방관 출신이다. 소방공무원은 교원·군인·경찰 다음으로 많은 6만4000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는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소방관들이 정치적 감각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직업적 이익에 대한 결집도가 떨어져서였을까. 사실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살리고 지키는 소방업무는 정치의 본질과 맥이 닿아 있다.

그동안 소방관 출신 정치인이 나오지 못한 것은 대부분 지방직 공무원으로 17개 시·도에 분산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국가직으로 전환되면서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이 왔다. 민주당에 영입된 오영환 소방관(32)은 지난해 말 사표를 냈다. 2월 7일 만난 그는 “이렇게 언론에 인터뷰하는 것이 어색하다”며 아직 ‘공무원’ 티를 벗지 못했다.

소방 출신 국회의원 지금까지 없어

-정치에 뛰어든 지 두 달이 채 안 됐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요즘, 일상은 어떠한가.

“내가 더 이상 사고현장에 출동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동료가 그립다.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한편으로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현장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은 변치 않았다. 소방관일 때는 현장에서 사람을 구했지만, 지금은 법과 제도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하자는 것이다. 활동은 정치신인으로서 매우 조심스럽다.”

-비례로 출마하나, 아니면 지역구 어디에서 출마할 것인가.

“경기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는데 오래 서울에서 생활해 딱히 지역 연고는 없다. 당의 지시와 처분에 따르겠다. 요즘 당에 영입된 각 부문 인재들과 어떻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해결책을 모색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소방청 독립 등 소방발전에 오래 헌신한 선배를 제치고 10년차밖에 안 되는 젊은 소방관을 여당이 스카우트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주변 소방관들의 반응은 어떤가.

“많은 선배가 소방청 독립을 위해 주어진 법과 제도에서 노력했다. 불과 10년차에 불과한 내가 선택된 이유는… 현장에서 구조대원으로 근무하면서 소방정책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왜 소방청이 독립돼야 하는지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이 평가된 것 같다. 젊은 현장 소방관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모습을 의미 있게 봐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주변에서 ‘어려운 선택을 했다’고 응원해주는 선배·동료·후배 많다. 같은 소방인으로서 힘을 모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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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119구조본부 오영환 대원이 고층빌딩 옥상에서 환자를 구조해 헬기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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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국회의원이 되어 안전 관련 법안을 제정·개정한다면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라 보는가.

“최근 고시원 화재 후 전국 고시원에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를 소급 적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시원보다 시급한 곳은 노인·장애인·어린이 등 신체적으로 화재 인지가 늦고, 대피가 어려운 재난 취약계층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쪽방촌 노인이 화재에 더 취약하다. 이들에게 우선 자동소화설비가 의무적으로 소급 적용되고, 예산이 지원돼야 한다. 소방법은 물론 전기·가스·건축 등 70여 개 법에 분산돼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지 않아 이런 재난 취약계층에 대한 특별법이 시급히 제정돼야 한다.”

그가 재난 취약계층에 대한 보완과 지원을 첫 번째 과제로 꼽은 것은 체험한 ‘처절한’ 현장경험 때문이다. 그는 “열악한 쪽방에서 불이 나 숨진 어르신이나 장애로 움직이지 못한 여자아이가 전기장판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은 시신을 직접 수습하면서 이런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없을까 절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국회에 국민안전과 관련된 소방관계법이 21개나 계류돼 있는데, 아무 이유 없이 처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 전 소방관 경력을 보니 2008년 의무소방대에 복무할 때 해운대해수욕장 119수상구조대, 2012년 119특수구조단 도봉산산악구조대, 2015년 성북소방서 119오토바이구급대원을 거쳐 2017년부터 퇴직 직전인 지난해 12월까지 중앙119구조본부 항공대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니까 바다·산·육지·하늘 등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소방관 10년에 이렇게 재난의 모든 현장을 경험하기도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이런 경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재난 현장의 ‘산전수전’ 모두 경험

“10대에 소방관, 특히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구조대에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상 구조대가 되니 산악구조대가 더 보람 있어 보여 거기를 자원했고, 산악구조대를 해보니 항공대원은 화재현장은 물론 산악·수상구조에 응급처치와 환자이송까지 모두 알아야 하는 구조의 최고단계라는 생각에 항공구조대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다.”

전문가들은 재난은 예방-준비-대응-복구의 4단계 순환을 거치는 것으로 이론화한다. 재난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가는 소방은 바로 대응단계에서 필요한 조직이다. 특히 오 전 소방관이 했던 구조·구급은 대응단계에서도 가장 빨라야 할 업무다. 그리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예방과 준비 단계이고, 예산을 확보해 재난을 수습하는 것은 복구단계다. 지금까지 오 전 소방관은 재난 상황에서 일부였던 대응단계에서 활동했다면 그가 법을 만들고, 예산을 확보하는 정치인(국회의원)이 된다면 재난의 모든 상황을 ‘실전’에서 꿰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될 것이다.

대부분 지방직 공무원이던 소방은 올해 국가직으로 바뀌면서 전국 조직으로 거듭났다. 전직 소방관과 가족까지 합하면 ‘100만 소방인’이라고 한다. 그는 말단 공무원으로 소방청 독립과 국가직화를 위해 ‘겁 없는’ 투쟁까지 했다. 소방공무원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재난의 최일선에 있으면서도 예산 배정이나 승진 등에서 행정직 공무원에 밀려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예산·인사가 독립된 소방청 설립이 오랜 염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방청 독립을 공약했지만 소방직과 일반직의 민방위, 토목직의 재난 부문이 함께 섞인 소방방재청으로 절반의 독립만 이뤄줬다.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이 소방방재청을 없애고 총리실 산하 국민안전처로 정부조직을 개편했다. 이 정부조직 개편에 말단 소방관이던 오 소방관이 광화문에서 반대하는 1인 시위에 나선 것이다. 그는 소방관 제복을 입고 ‘국민 여러분! 위험에 빠진 119를 구해주세요’, ‘국민안전처 신설은 행정관료의 잔칫상으로 국민의 안전이 아닌 그들의 안전일 뿐’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현직 공무원이 정부방침에 불복해 시위를 벌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청와대는 시위하는 오 소방관을 감찰해 징계하라고 소방방재청에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근무시간을 피하고, 연가를 내서 1인 시위를 했다. 공무원이라도 집단 시위가 아닌 1인 시위는 표현의 자유로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단 현장 소방대원이었지만 국민의 안전에 역행한다는 판단으로 시위를 벌였다”면서 “당시 상사인 서울소방 특수구조단장이 많이 걱정했지만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 들어 국민안전처는 폐지되고, 예산과 인사·지휘권이 독립된 소방청이 탄생했다. 그는 소방청 독립의 공로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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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오영환 소방관이 광화문 광장에서 정부의 소방방재청 해체에 항의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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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방관의 기도> 책으로 펴내

그동안 정부는 대형 사고만 터지면 재난관리 콘트롤타워만 계속 높여왔다. 재난을 관리할 수 있다는 공무원적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사실 과거 큰 인명피해를 내는 태풍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는 예측과 관리가 가능했다. 그러나 산업화되고 인구가 밀집화된 요즘 재난은 예측불허 상황에서 발생하고 인명피해도 많다. 따라서 안전처와 같은 관리조직이 아닌, 소방청과 같은 신속한 대응조직과 현장 지휘체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안전은 높은 지휘탑이 아닌 평시에도 체질화된 아래로부터 정착된 문화가 중요하다. 오 전 소방관도 “안전은 유치원부터 몸에 체감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공감했다.

오 전 소방관은 1988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군인(소령)으로 제대 후 사업을 하다 실패하면서 어려운 가정생활을 했다. 그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봉지쌀을 사 먹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방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인제대에 진학했지만 빠르게 소방관이 되기 위해 자퇴 후 소방시설관리업체에서 근무했다. 이런 인연으로 의무소방대에 복무하면서 소방관에 특채됐다. 그는 해운대해수욕장 수상119에 근무하며 처음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다. 이후 산악·오토바이·항공 구조대원으로 6명의 심정지 환자를 살려 ‘하트세이버’ 표창을 6번이나 받았다. 이런 노력으로 구조대원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항공구조대원이 됐다.

그는 재난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생생한 이야기를 다음 블로그에 연재했다. 그의 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했고, 2015년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책으로 나왔다. 그는 “안전에 대해 같이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체험한 재난현장 모습을 인터넷에 올렸다”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해 한 (짧은 소설) 공모전에 당선됐다”고 말했다. 이 책의 수익금은 재난 취약계층에게 기부하고 있는데, 1000만원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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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환 소방관이 중앙119구조본부 헬기를 타고 해상구조를 위해 잠수장비를 착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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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직 소방관으로 근무하며 야간에 공부해 2016년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를 졸업했다. 아내는 스포츠 클라이밍 국가대표 김자인 선수로,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의 월드컵 리드 28회 우승을 이뤄 ‘암벽여제’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는 “안정적 공무원 생활을 버리고 불확실한 정치인 길을 가겠다는 남편을 말리지 않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진정성 있는 일은 서로를 존중하고 응원한다”면서 “아내는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이해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 인재영입팀으로부터 영입 제안이 왔을 때 천직으로 삼기로 한 구조대원을 그만두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솔직히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이유로 이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소방에 애정을 가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면서 “현장에서 한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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