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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전국에 수천수만 '문보전사' '가갸꾼' 키워내 문맹을 퇴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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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9] 문자보급운동 주도한 장지영

주시경 제자로 조선어학회 창립, 조선일보 편집인·문화부장 맡아

일제 탄압에도 한글 보급운동… 교재 100만부 만들어 전국 배포

장준하 "신문은 캄캄한 조국 비춘 유일한 등불이자 희망이었다"

조선일보

국어학자 장지영


서울 흑석동 신문 박물관 '뉴지엄' 3층 정면에는 국가등록문화재 3점이 있다. 조선일보가 1929년부터 문자보급운동을 펼치면서 교재로 사용했던 '한글 원본'과 '문자보급교재' '한글 원번'이다.

문화재청은 2011년 이 3점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일제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대응해서 국민 계몽과 민족정신을 위해 조선일보사가 펼친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발행한 학습 교재"라면서 "우리 민족운동사의 구체적인 증거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등록문화재는 근대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이 등록문화재를 만든 주역은 조선일보 편집인과 문화부장 등을 지낸 언론인이자 한글학자 장지영(1887~1976)이다. 그는 20세 때부터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을 사사했다. 장지영은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 주시경 선생의 사저에 3년 동안 다니면서 배웠다. 내 국어학의 기초는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회고했다. 1921년 장지영은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전신)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 조선일보 교정부 기자로 입사했다.

그가 문자보급운동에 나선 건 1928년 조선일보 편집인에 취임한 이후다. 일제는 '사실 유무를 막론하고 남의 명예에 관한 일을 게재할 때에는 유죄로 판결한다'는 규정을 악용해 민족지를 탄압했다. 당시 편집인은 기사가 문제가 됐을 때 법적 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장지영은 "종로경찰서 사찰계와 검찰국을 내 집 드나들 듯해서 나도 모르게 전과 4범이 됐다"고 했다. 한국 최초의 민간지 여기자인 최은희(1904~1984)는 "장지영 선생은 정간 중에도 지원자에 한해서 매일 오후 4시마다 편집실에 '회의 중'이라는 팻말을 달아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한 뒤 철자법을 가르쳤으며, 나도 그때 배운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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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흑석동에 자리한 신문박물관 ‘뉴지엄’ 직원들이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 교재를 살펴보고 있다. /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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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보급운동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남녀 학생들이 농촌의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운동으로 일제강점기 최대 민중 계몽운동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2000만 인구 가운데 1700만명이 문맹이었다. 장지영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 아래 1929년부터 3년간 이 운동의 총책임을 맡았다. 1930년에는 '한글 철자법 강좌'를 55회에 걸쳐서 장기 연재했다. 이듬해인 1931년 문자보급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신설된 문화부의 부장을 맡았다.

문자보급운동 첫해인 1929년에는 409명의 학생이 참여해서 2849명이 한글을 깨쳤다. 1934년에 이르면 10배가 넘는 5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이 운동에 뛰어든 학생들은 '문보전사(文普戰士)', 시골에서 글을 배우던 사람들은 '가갸꾼'으로 불렸다. 준비한 문자보급 교재도 100만 부에 이르렀다. 장지영은 "3년간 우리나라 전국에 안 간 곳이 없었다. 글을 깨쳐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된 사람이 30만명이 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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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 배워야 한다’는 구호를 대대적으로 내걸고 문자보급운동을 주창한 1931년 1월 1일 조선일보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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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도 1931년 '브 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문맹 퇴치 운동에 나섰다. 평양 숭실중학교 학생이었던 장준하는 "이때부터 나는 신문을 높이 보게 되었으며 인연 깊은 나의 지도자적 대상으로, 아니 당시 우리 온 겨레를 지도하고 있는 존재로 아주 믿어버리게 됐다"면서 "이 두 신문만이 캄캄한 우리 조국을 비춰주던 유일한 등불이었으며 희망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의 압력으로 문자보급운동은 1935년 중단됐다. 하지만 장지영의 '한글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1931년 연구회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꾼 뒤 사전 편찬에 나섰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됐다. 영화 '말모이'의 배경이 된 사건이다. 수필 '딸깍발이'의 국어학자 이희승은 "장지영을 말하려면 한글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한글을 말하자면 조선어학회를 들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광복 후 장지영은 연세대·이화여대 교수를 지냈다. 그의 아들 장세경 한양대 국문학과 명예교수와 손자 장경현 조선대 국어교육과 교수도 3대째 국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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