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바와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건축가다. ‘트로피컬 모더니즘’으로 불리는 그의 작품들은 건축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들르는 유명한 관광지다. 콜롬보에 있는 바와의 자택에서 영국인 부부가 집 안 복도에 꾸민 정원을 살펴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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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바와(Geoffrey Bawa)라는 남자가 있다. 영국이 지배하던 식민지 스리랑카에서 1919년 태어났다. 부유한 변호사 집안의 차남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영국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25살에 변호사가 되어 돌아왔다. 처음 변론을 맡은 게 살인사건이었는데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변호사 일에 흥미를 잃은 그는 미국·유럽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의 시골 정원에 매료됐다. 스리랑카로 돌아와 자기 농장을 그렇게 꾸미려다 부족함을 느낀 그는 다시 런던의 건축학교에 들어가 38살에 건축가로 변신했다.
바와는 버거(Burgher)였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식민지를 차례로 겪은 스리랑카에서 백인 혼혈을 그렇게 불렀다. 식민 본국은 버거를 차별했고 스리랑카인들은 색안경을 끼고 봤다. 중간에 낀 그 위치가 지식인·예술가로서 그의 자의식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갤러리 카페에 전시된 바와의 두상. 그는 피부색이 하얗고 키가 컸다. 외모는 백인에 가까웠지만 혼혈로서 그의 정체성은 스리랑카와 서구의 전통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그의 건축으로 표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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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리랑카 전통건축에 서구의 건축양식을 더하고 열대우림의 자연까지 끌어안았다. 사람들은 그 건축에 ‘트로피컬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와는 단숨에 세계적 건축가의 반열에 올랐다. 국회의사당부터 사원, 대학, 공장, 개인 주택, 호텔·리조트에 이르기까지 스리랑카엔 그가 남긴 유명한 작품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마음에 드는 건물들 사이에 선을 그으면 그대로 여행 동선이 된다.
■ 경계인이 보여준 예술
스리랑카 남부의 항구도시 갈레(Galle)에서 여정을 시작해 벤토타(Bentota)를 거쳐 수도 콜롬보까지 바닷가를 끼고 북상하는 코스를 택했다. 갈레는 중세에는 아랍 상인들의 교역항, 서구 열강의 지배기에는 요새 역할을 했던 도시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주택과 등대, 시계탑이 어울린 갈레 요새(Galle Fort)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바와가 설계해 1997년 완공된 라이트하우스 호텔. 제트윙 그룹에 인수되면서 지금은 제트윙 라이트하우스 호텔로 이름을 바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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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 북부 해안가에는 바와가 설계한 ‘제트윙 라이트하우스 호텔’(Jetwing Lighthouse Hotel)이 있다. 바와가 명성을 얻고 활발히 활동하던 1960~1990년대는 스리랑카가 관광지로 부상하던 때다. 호텔 수요가 넘쳤고 큰 프로젝트일수록 바와에게 몰렸다. 그가 1967년 설계한 벤토타 비치 호텔은 그의 작품 중 첫 호텔이면서 스리랑카 최초의 대규모 호텔이기도 하다.
바와는 스리랑카에서만 13개(해외 포함 35개)의 호텔 작업을 했다. 그중 설계 당시 원형대로 지금껏 남아있는 5개의 호텔 중 하나가 바로 제트윙 라이트하우스 호텔이다.
호텔 입구 나선형 계단 난간에 설치된 조각작품. 17세기 스리랑카를 침략한 포르투갈 군대와 벌인 ‘란데니야 전투’를 형상화했다. 외세의 침략이라는 위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왕은 높은 곳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피리를 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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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호텔에 머물며 구석구석 둘러봤다. 입구부터 남달랐다. 거대한 조각작품이 로비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빙 둘러 채우고 있었다. 바와의 미술가 친구인 라키 세나나야케(Laki Senanayake)의 작품인데, 17세기 스리랑카를 침략한 포르투갈 함대와 싱할라(스리랑카 다수 민족) 군대의 전투를 표현했다. 대포에 맞선 화살과 창. 비슷한 역사를 공유한 아시안으로서 그 뻔한 결과에 새삼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독특한 구조의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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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하우스 호텔은 갈레 북부의 바위가 많은 해안가에 지어졌다. 해변에 있던 돌을 그대로 둔 채 건물을 완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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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물은 출입구에 바윗덩이 몇 개가 가로막듯 버티고 서 있었다. 돌 하나까지 있는 그대로 지형을 살려 설계한 흔적이라 했다. 바다에 면한 식당 테라스에 앉아 있으면 갯바위에 요란하게 부서지는 포말이 테이블까지 튀어오를 것만 같았다.
수영장 물이 위로 흘러내리거나 기하학적 패턴을 만드는 등 여기저기 독특한 계단들에도 바와의 지문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바다를 향한 객실에서 맞은 보랏빛 석양은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식당의 야외 좌석에서는 바로 붙은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식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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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건물 위로 떠오른 무지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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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을 압축한 공간
벤토타 해변에서 차로 20분쯤 내륙으로 들어가면 바와가 처음 건축가의 꿈을 키우고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인 ‘루누강가’(Lunuganga)가 나온다. 루누강가는 싱할라어로 소금의 강이란 뜻이다.
루누강가에서는 오전 9시30분·11시30분, 오후 2시·3시30분 등 하루 네 차례 가이드투어(영어)가 진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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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는 30대에 구입한 거대한 고무농장 부지에 여러 채의 건물을 짓고 고쳐가며 50여년간 가꿨다. 그 과정에서 전문적인 건축지식을 쌓기 위해 런던의 건축학교로 유학을 갔고, 건축가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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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강이 만나는 열대우림 지역의 고무농장을 사들인 바와는 50년 넘게 이 공간을 가꾸며 자기만의 건축 실험실로 삼았다. 거대한 녹지에 여러 채의 건물을 짓고 고쳤다. 콜롬보에서 70여㎞ 떨어진 루누강가를 바와는 주말별장으로 썼다.
관광객들은 하루 네 차례 진행되는 1시간짜리 가이드투어를 통해 루누강가를 돌아볼 수 있다. 일부 건물에선 숙박도 가능하다.
바와는 흑백 패턴을 좋아했다. 집 바닥을 흑백 모자이크로 칠한 건 물론 침구도 흑백 무늬를 썼다. 심지어 애완견도 달마시안을 키웠다. 루누강가에서 기르는 소들도 검은털과 흰털이 섞인 얼룩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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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누강가는 열대우림에 꾸민 거대한 정원이었다. 가이드가 루누강가의 연못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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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는 단순한 것, 오래된 것, 고전적인 것을 좋아했다. 집도 그렇게 꾸몄다. 흑백 패턴을 좋아해 집 바닥을 전부 흑백 모자이크로 칠했고 반려견도 달마시안을 키웠다. 건물마다 큼직한 창과 출입문을 내 바람이 통하게 했고 숲과 연못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건물 안팎은 하나인 듯 이어지고 주변 지형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집 안은 전 세계를 여행하며 모은 가구와 예술품으로 채웠다. 정원 곳곳에 직접 디자인한 의자와 테이블을 갖다 놓고 휴식을 즐겼다. 이른 아침 산책 나와 플루트를 불던 곳, 저녁마다 강가의 석양을 보며 진토닉을 마시던 장소가 다 따로 있었다. 루누강가는 바와가 평생 추구한 건축 철학과 내밀한 취향이 집약된 장소였다.
바와의 친구였던 호주 예술가 도널드 프렌드가 만든 사람 얼굴 모양의 화분. 머리카락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눈길을 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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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하우스 호텔의 조각작품을 만든 바와의 친구 라키 세나나야케는 루누강가의 ‘게이트 하우스’에도 벽화를 남겼다. 루누강가에 숙박 예약을 한 관광객들이 벽화 앞을 지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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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는 예술가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집이나 별장엔 항상 소수의 친구들만 초대했다고 한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루누강가에선 하루 세 끼를 매번 다른 장소에서 먹었고 20여명의 하인들이 그를 시중들었다. 정원과 건물 곳곳에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종 14개를 매달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울려서 사람을 불렀다는 얘기엔 조금 비위가 상했다.
바와는 2003년 84세에 사망했다. 유언대로 시신은 화장해 루누강가의 시나몬 언덕에 뿌렸다. 벤토타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에서 얼룩소 두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바와가 종종 친구들과 식사를 했던 정원의 런치 테이블. 테이블 옆 잭푸르트(열대과일) 나무에 버마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종을 매달아놨다. 바와가 종을 울리면 하인들은 소리를 듣고 어느 장소인지 파악해 시중을 들러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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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의 유해가 묻힌 루누강가의 시나몬 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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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지 않는 존재감
콜롬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약속장소를 꼽으라면 ‘갤러리 카페’(The Gallery Cafe)가 빠지지 않는다. 생활소품 등을 파는 디자인숍 ‘파라다이스 로드’가 운영하는 갤러리 카페는 미술전시관과 레스토랑을 겸하는 공간이다. 원래는 바와가 30년 가까이 건축사무소로 사용한 곳이었다.
그는 1961년 한 의사의 부탁으로 집을 설계했는데, 공사 중에 그 의사가 갑자기 호주로 떠나 계약이 파기됐다. 바와는 자기 돈으로 공사를 끝내고 그 공간을 사무실로 썼다. 수많은 걸작의 밑그림이 거기서 그려졌다.
바와가 1961년부터 1989년까지 건축사무소로 사용하던 건물은 호텔리어 출신의 스리랑카 사업가가 설립한 디자인 브랜드 ‘파라다이스 로드’가 인수해 1998년부터 미술관 겸 레스토랑인 ‘갤러리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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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과 마당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중정. 연못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벽에는 신진 작가들의 전시회가 주기적으로 열린다. 파라다이스 로드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위해 바와에게 건물을 넘겨받으면서 일부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공간은 바와가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던 시절 손님들의 대기장소로 사용됐던 곳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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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아치형 대문과 마당을 통과해 단층 건물에 들어서면 좁고 긴 연못이 있는 중정이 나온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 벽에 걸린 회랑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확 트인 공간이 등장하며 시선을 분산시킨다.
바와가 사용하던 길다란 책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지만 케이크 진열대로 바뀌었다. 키 큰 고목이 우거진 안마당은 분위기 있는 야외석이 됐다. 의자는 물론 바와가 디자인한 작품이다. 음식 가격이 비싸서 그런지 눈에 띄는 손님은 대부분 외국인 아니면 옷차림이 화려한 부자들이었다. 색 바랜 벽돌로 쌓아올린 벽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콘크리트로 다리를 세우고 대리석을 올린 책상. 바와가 사용하던 그대로다.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변한 지금은 낮 시간에 케이크가 진열 용도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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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카페는 보통의 스리랑카 식당에 비해 음식 가격이 비싼 편이다. 파스타와 스테이크 등 서양 음식을 파는데 맛도 특별히 뛰어나지 않다. 내부를 둘러보고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낮시간에 들러 커피 등 음료만 주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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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찍 산책 삼아 베이라 호수까지 걸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현대식 불교사원 ‘시마 말라카’(Seema Malaka)도 바와의 작품이다. 승려들의 출가 의식을 치르는 장소로 지어진 사원은 특이하게도 지역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 격이었던 무사지(Moosajee)라는 사람이 후원한 돈으로 지어졌다. 게다가 바와는 명목상이지만 기독교인이었다.
베이라 호수 위에 세운 불교사원 시마 말라카. 처음 지었을 때와 지붕의 기와 색이 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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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나무와 불상 앞에서 기도하는 스리랑카 시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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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벗고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가운데에 사당이 있다. 왼쪽으로 있는 보리수 나무와 불상 앞에는 기도하는 줄이 끊이지 않는다. 사당 둘레에 줄줄이 선 작은 불상들은 표정과 손동작이 모두 제각각이다. 불상의 어깨 너머로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잔잔한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매연과 인파로 늘 번잡한 콜롬보 도심에서 좀처럼 맛보기 힘든 차분함이 있었다.
시마 말라카는 번잡한 콜롬보 시내에서 드물게 차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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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사랑한 나무
운 좋게도 하루 세 번 있는 가이드투어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수더분한 외관과 달리 집 내부는 몇 걸음마다 의외의 광경을 펼쳐냈다.
콜롬보의 고급 주택가 골목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바와의 자택. 평범한 겉모습과 달리 실내는 구조가 복잡하고 개성이 넘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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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가 아끼던 롤스로이스 자동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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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들어서면 바와가 영국 유학 시절부터 탔다는 1934년식 롤스로이스가 먼저 맞는다. 바닥과 벽을 새하얗게 칠한 복도는 괜히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코너를 돌 때마다 나무를 심어놓은 정원이 등장했다. 정원 위로 하늘이 보였다. 줄무늬로 마감한 천장의 결을 따라 빛이 부서져 내려왔다. 사나운 열대의 태양을 길들이려는 의도였을까. 가이드는 “이 흙 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상상해보라”며 자랑스레 미소 지었다.
사방을 하얗게 칠한 복도를 걷다 보면 중간에 천장이 하늘로 뚫린 작은 정원을 만나게 된다. 열대의 뜨거운 태양이 잔잔히 부서져 실내로 스며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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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집 안에 끌어들인 게 너무 마음에 들어요.” 런던에서 왔다는 노부부 폴과 아만다는 낮은 목소리로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들은 바와가 설계한 벤토타 비치 호텔에도 다섯번이나 묵었다고 했다. “정작 스리랑카 사람들은 바와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했던 루누강가 안내인의 말이 떠올랐다.
하룻밤에 몇십만원씩 하는 자연주의 호텔에 드나들 수 있는 스리랑카 국민이 몇이나 될까. 대중과 유리된 그런 예술도 ‘스리랑카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바와 때문에 스리랑카를 찾는 관광객이 있고, 많은 스리랑카인들이 결과적으로 그의 덕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콜롬보의 바와 자택은 벤토타 강변의 주말별장 루누강가와 마찬가지로 그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예술품과 직접 디자인한 가구 등으로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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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끝부분을 둥글게 만 계단 난간 장식은 바와가 디자인한 의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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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의 침실 정면에 난 창으로 그가 사랑하던 플루메리아 나무가 보였다. 그가 설계한 거의 모든 건물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그 나무는 바와 건축의 일부였다. 꿀이 없는 플루메리아 꽃은 나방을 유혹하기 위해 밤마다 진한 향을 내뿜는다. 한 번이라도 그 향기를 맡았다면 좀처럼 잊기 힘들다. 제프리 바와도 그런 남자였다.
루누강가에서 바와가 사용하던 메인 방갈로 건물 앞에 두 그루의 커다란 플루메리아 나무가 서 있다. 바와는 자신이 설계한 거의 모든 건물 곁에 플루메리아를 심었다. 나무는 그의 건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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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꽃을 피우는 플루메리아(Plumeria alba). 남태평양 섬나라에서는 꽃목걸이(lei)를 만든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타히티 등)에서는 플루메리아 꽃을 어느쪽 귀에 꽂았는지로 혼인 여부를 표시하기도 한다. 라오스에서는 국화(國花)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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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보의 바와 자택에 전시된 관련 서적들. 바와가 살던 집은 현재 ‘제프리 바와 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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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트윙 라이트하우스 호텔에서 맞은 석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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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In Search of Bawa - Master Architect of Sri Lanka>(David Robson, Talisman, 2016), <Bawa - The Sri Lanka Gardens>(David Robson, Thames&Hudson, 2017), <우연에서 만난, 즐거운 발견>(안종현, 토야네북스, 2012) 등 관련 서적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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