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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이슈 미술의 세계

전쟁도, 혁명도, 히틀러도 `사랑의 화가` 샤갈을 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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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38] 마르크 샤갈 (1887~1985)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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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나는 기분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이 남긴 말이다. 많은 사람은 '멀리서 보면 희극'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비극에 휘말리더라도, 멀리서 보면 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기에 금세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 발치 떨어져서 자신의 고통을 관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코앞에 있는 고통을 어떻게 멀리에서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인간의 운명은 행복보다 불행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한 프로이트의 철학이 더 공감하기 쉽다. 삶이 크고 작은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건 매일 체감 가능하다. 아침 잠은 항상 부족하고, 어깨는 늘 뭉쳐 있다. 주말을 맞이하려면 주중의 지옥철을 견뎌야 하고, 노후 파산을 막으려면 수십 년간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 노력한다고 불행을 피하는 것도 아니다. 우린 갑자기 병에 걸릴 수도 있고, 하루아침에 가까운 사람을 잃기도 한다.

행복이 특별한 이유는 가끔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레벨로 분류하면 사랑은 꽤 높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은 하늘을 나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눈앞에는 무언가가 어른거린다. 연인과 함께할 때면 무중력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마음이 두둥실 떠오른다. 마르크 샤갈 그림이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마법 같은 '사랑의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샤갈 그림엔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기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붕 떠오른다. 낭만적인 그림을 많이 남긴 샤갈의 삶은 그의 그림과 달리 풍파로 가득했다. 소나기가 샤갈만을 따라다니는 듯했다. 불행을 달고 살았던 샤갈은 어떻게 '사랑의 화가' 칭호를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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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테프스크 위에서(1915) /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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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유대인' 마르크 샤갈

태어난 순간부터 샤갈에겐 굴곡진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샤갈은 러시아 태생이다. 가난한 집에서 9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게다가 유대인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도 유대인은 2등 시민이었다. 대도시 한복판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샤갈이 태어난 비테프스크(현재는 벨라루스)는 유대인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였다. 샤갈이 기억하는 유년은 어둡지만은 않다. 샤갈은 소박한 유대교 예배당과 시골 마을의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화가라는 꿈을 키워나갔다.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준 유대인 공동체 사회의 온기를 평생 간직했다.

1907년 샤갈은 제대로 그림을 배우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당시 러시아 수도였던 그곳은 예술가 지망생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발레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본격적으로 배우려면 예술 학교가 밀집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력을 쌓아야 했다. 이 모든 기회는 유대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유대인은 예술 학교는커녕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것조차 제한됐다. 샤갈은 겨우 가짜 통행증을 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리 잡았다. 여러 행운이 겹쳤다. 후원자를 만나 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1910년 넓은 세상을 보려 프랑스에 간다. 파리에 도착한 샤갈은 도록에서만 봤던 마네, 모네, 고흐, 마티스 그림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는 어지러울 만큼 황홀감에 빠졌다. 곧바로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파리를 두 번째 고향으로 삼고 이름마저 바꿨다. '마르크 샤갈'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은 이때 탄생했다. 원래 이름은 모이셰 하츠켈레프 세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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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을(1911) /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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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속엔 고향이

오늘날 샤갈은 피카소와 함께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화가다. 경매 시장에서도 샤갈은 인기가 많다. 하지만 비평가에겐 비교적 과소평가받기도 한다. '인상파' 모네, '야수파' 마티스, '입체파' 피카소, '초현실주의' 호안 미로 등 당대 거장은 고유한 영역을 개척하며 전설이 됐다. 하지만 샤갈에게는 이렇다 할 타이틀이 없다. 샤갈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파리 예술계 권력은 피카소였다. 그래서 샤갈도 입체파에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한 화파에 속하기를 거부했다. 인상파 화가 선배의 철학을 체화했고, 야수파에서는 과감한 색 사용을 배웠다. 가장 중요한 건 시인으로부터 가져왔다. 샤갈은 화가보다는 시인과 더 잘 어울렸다. 파리의 시인들로부터 샤갈은 자신의 정서를 예술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초기작 '나와 마을'(1911)은 샤갈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좋은 그림이다. 이 작품 안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유대인으로서 정체성, 파리에서 받은 영향을 모두 담았다. 암소와 남자 농부가 마주 보고 있다. 화면 구성은 입체파에서 영향을 받은 듯 기하학적 구도로 나뉘어 있다. 야수파처럼 과감한 색채도 사용했다. 하지만 샤갈에게 형식은 형식일 뿐이었다. 그는 파리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고향을 그리워했다. '나와 마을'은 향수병에 빠진 마음을 달래려 그린 작품이다. 암소와 농부 얼굴 사이엔 고향 풍경이 펼쳐져 있다. 저 멀리엔 유대교 예배당이 보이고, 산양 젖을 짜는 여인과 낫을 든 농부도 그려 넣었다. 따스한 동화 같은 이 그림 덕에 샤갈은 색을 잘 쓰는 화가로 소문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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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1914) /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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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와 함께 날아올랐다

대표작 '생일'(1915)은 샤갈을 모르는 사람도 어딘가에서 봤음 직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 깃든 감정은 해석의 여지가 없다. 오직 사랑만이 가득하다. 샤갈은 프랑스로 오기 전 러시아에서 벨라 로젠펠트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둘은 미래를 약속한다. 러시아에 벨라를 두고 유학 온 샤갈은 한 번도 연인을 잊지 않았다. 1914년 샤갈은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간다. 당시 샤갈은 주목받기 시작한 화가였지만, 가난한 집안의 예술가는 그때도 인기가 없었다. 부유한 보석상이었던 벨라 부모는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불붙은 연인을 끝내 갈라놓진 못했다. 샤갈은 1915년 7월 25일 벨라와 결혼한다. 결혼 직전인 7월 7일은 샤갈 생일이었다. 그날 벨라가 꽃다발을 들고 샤갈을 찾아왔다. 샤갈은 약혼자를 보자마자 표현하기 어려운 황홀함에 휩싸였다. '생일'은 이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작품 속에서 샤갈과 벨라는 입을 맞춘다. 샤갈은 설레고 들뜬 나머지 두둥실 날아올랐다. 샤갈이 프랑스에서 어울렸던 예술가는 대부분 대단한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달리 샤갈은 벨라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사랑을 그렸다.

부부는 프랑스로 가려 했다. 하지만 1914년에 발발한 1차 대전 때문에 국경이 봉쇄됐다. 그럭저럭 잘 풀렸던 샤갈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뒤숭숭했지만, 신혼이었던 샤갈은 벨라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축복이었다. 이 기간에 그려진 '도시 위에서'(1914~1918)에서는 '생일'과 마찬가지로 샤갈의 들뜬 마음이 전해진다. 그림 속에서 샤갈은 벨라를 꼭 껴안고 비테프스크 하늘을 날고 있다. 연인은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발 밑 세상에서 벗어나 둘만의 유토피아로 향하는 중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 최초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샤갈은 이 거대한 흐름을 반겼고 발을 담갔다. 혁명 세력은 소수민족 차별정책부터 없앴다. 유대인 샤갈은 비테프스크 미술학교 교장 자리에 오른다. 그는 희망에 부풀어 고향을 파리처럼 예술 도시로 만들려 했다. 상황은 조금씩 이상한 방식으로 흘렀다. 혁명으로 권력을 쥔 세력은 자신의 가치를 공고화하려 예술가를 옥좼다. 그들은 샤갈에게 물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당신의 그림은 레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왜 공산주의를 위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가." 샤갈 머리 위에 드리운 먹구름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샤갈은 궁지에 몰렸다. '반혁명적' 예술가로 낙인찍혔다. 목숨마저 잃을 수 있었다. 1922년 샤갈은 벨라와 함께 러시아를 탈출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외출이었다. 난민처럼 떠돌다 파리에 정착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샤갈에겐 벨라와 딸이 있었다. 계속 그림을 그렸고, 이름값은 높아졌다. 하지만 행복은 짧았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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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빛을 향하여(1986) / 샤갈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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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 덮치고 또 덮쳤지만…

유대인 숙청에 앞장섰던 히틀러는 샤갈을 콕 찍어 제거해야 할 예술가로 취급했다. 나치는 1937년 '퇴폐미술전'을 열어 샤갈 그림을 전시했다. 그러면서 '삐뚤어진 유대인 영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조롱했다. 1년 후 샤갈은 유대인 학살을 비판하는 '하얀 십자가상'을 그리며 히틀러에 대항했다. 나치 영향력은 나날이 커졌다. 샤갈은 겨우 미국으로 탈출했다. 당시 미국엔 샤갈처럼 나치를 피해 피란 온 유럽 예술가가 많았다. 미국은 단숨에 현대미술 중심지가 됐다. 예술가들은 기회의 땅 미국에서 다시 무언가를 창조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샤갈을 그러지 못했다. 미국에 온 지 3년 만에 벨라가 급성 간염으로 눈을 감았다. 벨라와 함께한 30년 동안 샤갈에겐 오직 벨라뿐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낀 그는 1년 가까이 붓을 들지 못했다.

벨라가 떠난 후 샤갈의 그림은 어두워졌다. 농밀한 사랑의 색으로 가득했던 그의 그림은 어두운 절망의 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암흑 속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사랑은 떠났지만, 사랑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샤갈은 조금씩 회복했다. 벨라와 함께했던 날을 떠올리며 다시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운으로 가득한 그림을 그렸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샤갈은 프랑스로 돌아간다. 반평생을 난민처럼 떠돌아다닌 샤갈은 결국 보상을 받았다. 그를 따라다니던 소나기는 그제 서야 멈췄다. 남은 삶은 비교적 평탄하게 흘렀다. 거장으로 칭송받았으며, 자신의 그림이 루브르에 걸리는 영광도 지켜봤다. 1973년에는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러시아 땅도 다시 밟았다. 고국을 등진 지 50년 만이었다. 1985년에 그린 '또 다른 빛을 향하여'의 주인공은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중인 화가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 화가 앞엔 캔버스가 놓여 있다. 거기엔 포옹 중인 남녀가 있다. 여자는 꽃을 들고 있다. 70여 년 전 샤갈 자신에게 꽃다발을 들고 왔던 벨라처럼. 샤갈은 이 그림을 완성한 직후 98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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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위에서(1914~1918) /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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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사랑과 희망을 색으로 칠해야 한다

샤갈은 20세기에 일어난 굵직한 비극을 정면으로 맞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차별당하는 존재였고,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랑하는 고향에서도 내쳐졌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면 납득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샤갈이 겪은 불운은 그저 불운이었다. 삶의 길목 곳곳에서 절망과 허무함이 샤갈의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벨라와 함께 날았던 샤갈은 끝내 추락하지 않았다. 사랑의 부력은 절망의 장력보다 힘이 셌다. 샤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진정한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

음악, 문학, 그림, 춤, 영화의 주요 관심사는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래서 사랑을 말하는 예술을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진부한 것이 가장 중요할 때도 있다. 삶이 불행으로 가득하고 또 언젠간 끝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부한 사랑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소나기가 내릴 것 같은 날 우산을 챙겨주는 연인, 끼니를 제때 먹었는지 걱정해주는 가족. 이런 소소한 사랑 덕분에 인간은 비극에 파묻히지 않고 희극을 개척해나간다. '사랑의 화가' 샤갈이 그랬던 것처럼.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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