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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슈 미술의 세계

"中·日에 뒤진다"며 미국에서 퇴짜맞았던 김홍도·정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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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의 자취-17] "김홍도와 신윤복은 말할 것도 없고 정선 그림도 전시회에 내놓기에는 부족하다."

1957년 우리 문화재의 첫 번째 국외 전시회로 미국에서 개최된 '한국 국보전'을 앞두고 우리 측이 제출한 전시품 목록에 대해 미국 측이 보인 반응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은 하와이 호놀룰루미술관 주관으로 폐허 속에서 지켜낸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기획한다. 중국·일본 미술품과 비교가 불가피한 탓에 전시품 선정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서예가 손재형, 화가 고희동, 언론인 홍종인, 소장가 전형필, 화가 배렴 등으로 선정위원회가 꾸려졌다. 청자·백자 등 자기류는 중·일에 비해 손색 없었지만 회화류는 그렇지 못했다. 단원과 혜원 그림이 우선 검토됐지만 미국 측에서 난색을 표했다. 심지어 우리가 최고로 치는 겸재의 산수도마저 송·원·명·청대 우수한 회화에 못 미친다며 거부했다. 한국 회화의 빈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인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불교조각 등 금속공예 17점, 도자기 108점 등 총 195점이 뽑혔고 유물은 해군 함정에 실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다행히도 전시회는 1957년부터 이듬해 1958년까지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예상밖의 대성공을 거둔다.

사실 한국 회화는 산수화나 인물, 화초, 영모 등 중국 모방작이 많고 전하는 작품도 많지 않으며 크기도 대부분 소형이다. 그런데 초상화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수한 초상화가 전해진다는 사실을 거의 모른다. 국보만 하더라도 이제현·안향·송시열 영정, 윤두서 자화상, 조선 태조 어진 등 5점이나 된다. 보물은 어진 2점과 사대부 초상화 63점, 승려 진영 5점 등 총 73점에 달한다. 각 문중에서, 또는 문중이 박물관에 기탁해 보관되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작품이 존재한다.

고려 후기 성리학이 전래된 후 조상에 대한 제사 문화가 정착되면서 추모용으로 영정 제작이 널리 확산됐다. 15~16세기에 일시적으로 영정 대신 신주를 봉안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전 시대에 걸쳐 영정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모셔졌다. 조정에서는 공신들에게 국가에 소속된 화가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영정을 하사하기도 했다. 각 가문에는 명망 있는 선조들 초상화를 수십 점씩 갖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이들 초상화는 당대 최고 화가들이 그려 예술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1~2m 안팎인 대작들이다. 방대한 규모에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초상화는 빈약한 회화의 공백을 메워주기에 충분하다.

매일경제

한국 회화사에서 전무후무한 걸작으로 꼽히는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규모가 방대한 초상화는 빈약한 회화의 공백을 메워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면 최고 수준 초상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국보 제240호(1987년 지정) 공재 윤두서(1668~1715) 자화상은 초상화는 물론 전체 우리 회화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거울을 통해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매, 강한 신념이 느껴지는 꽉 다문 입술,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등 사실적인 안면 묘사가 독보적이다.

윤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다. 종이에 옅게 채색해 그린 그의 초상화(가로 20.5㎝, 세로 38.5㎝)는 화폭 전체에 몸이 생략된 형태로 얼굴만 표현됐다.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그려졌다. 화폭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됐는데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한 형상이다.

신체 일부를 떼어 내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유교국 조선에서 금기시됐다. 공재는 극심한 당쟁 속에서 형제와 벗을 잃었다. 따라서 암울한 조선의 현실에서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던 굳은 의지와 다짐을 그림에 투영했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미완성작'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첨단 기법을 동원한 분석에서 전혀 다른 연구가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현미경과 적외선, X선 촬영, 형광분석법 등으로 조사한 결과 초상화는 원래 완성작이었으며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얼굴 외 부분이 퇴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귀는 희미하지만 붉은 선으로 표현됐고 옷깃과 옷 주름도 분명히 존재했다. 정밀하게 채색까지 된 사실도 확인됐다. 무슨 이유로 선과 채색이 지워졌는지, 어떻게 얼굴만 보존될 수 있었는지는 규명하지 못했다.

매일경제

한국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안양 영정(국보 제111호). 소수박물관 소장.


매일경제

원나라 최고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 영정(국보 제11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제현·안향 영정은 1962년 초상화 중에서는 처음으로 각각 국보 제110호와 제111호로 지정됐다. 오래된 초상화는 이모본을 제작하는데, 이제현·안향 초상은 유일하게 원본이어서 국보 명단에 포함됐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은 원나라 만권당에서 조맹부 등과 교류하며 고려에 성리학 등 신학문과 사상을 전파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국사' '역옹패설' 등 저서도 남겼다. 그의 초상화는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해 그렸다. 충숙왕 6년(1319년) 이제현이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갔을 때 당시 최고 화가인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원본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대부분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 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탁월해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영정은 가로 29㎝, 세로 37㎝인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다. 안향 초상화는 현전하는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됐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는 얼굴 윤곽을 붉은 선으로 나타냈다. 옷 주름은 선을 이용해 명암 없이 간략하게 처리했으며 시선 방향과 어깨선에서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안향이 세상을 떠난 지 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년) 문묘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배향할 때 1본을 더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매일경제

노론이 `송씨 성인`이라는 뜻에서 `송자`로 받들었던 송시열 영정(국보 제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87년 윤두서 자화상과 함께 국보 제239호로 지정된 송시열 영정은 현존하는 송시열 초상화 5점 중 제일 수작이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송시열(1607∼1689)은 우리나라 인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송자(宋子)'로 불리던 주자학의 거물이다. 그의 영정은 가로 56.5㎝, 세로 97㎝로 비단 바탕에 채색한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그가 45세 때 쓴 글이 있고 위쪽에는 정조가 쓴 찬문이 남아 있다. 화공의 솜씨가 뛰어나며 명암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표현한 강한 눈매와 숱 많은 눈썹, 붉은 입술 등에서 그의 성품이 보이며 옷의 흑백 대조로 유학자의 기품을 더해준다.

매일경제

태조 이성계 어진(국보 제317호). 청룡포를 착용하고 있는데, 고려와 조선 초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청색이 숭배됐다.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 소장.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국보 제317호)은 가장 늦게 국보 대열에 합류했다. 고종 9년(1872년)에 낡은 원본을 이모한 것이어서 애초에는 보물로 지정됐으나 전체적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데다 원본에 충실하게 제작됐다는 이유로 2012년 국보로 승격했다. 가로 150㎝, 세로 218㎝인 태조 초상화는 조선을 건국한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돼 총 26점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어진 1점만 남아 있다.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 쪽에 삐져나온 옷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의 특징이다. 다른 어진은 홍룡포 차림인데 유독 경기전의 태조 어진만 청룡포를 입고 있다. 숙종도 이 문제에 의문을 가져 신하들과 논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의미했던 청색은 고려시대에 숭배돼 개국 초기였던 태조 때에도 용포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록 보물이지만 국보로 손색이 없는 초상화도 허다하다. 조선 전기 초상화 양식을 잘 반영한 신숙주 영정(보물 제613호), 1968년 초상화 중 가장 먼저 보물이 된 정탁 영정(보물 제487호), 공민왕 작품으로 전해지는 염제신 영정(보물 제1097호), 충신의 대명사 정몽주 영정(보물 제1110호),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 영정(보물 제1215호),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 영정(보물 제1497호), 정조시대 명재상 채제공 영정(제1477호), 암행어사로 잘 알려진 박문수 영정(보물 제1189호), 임금 초상화인 영조 어진(보물 제932호), 영조가 왕자였던 시절 모습을 담은 연잉군 영정(보물 제1491호), 철종 어진(보물 제1492호) 등은 국보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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