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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희망나비’란 단체가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에 사는 한인 20여명이 회원이다. 2015년 말 나온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해 주워싱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던 동포들이 주축이 돼 2016년 1월에 만들었다.
“합의가 나온 다음 날 동포 현지 언론에 과거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에서 활동했던 분의 찬성 의견이 크게 보도되었더군요. 그때 대책위와는 다른 단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워싱턴희망나비 대표 조현숙씨 말이다.
창립 첫해는 버지니아 조지메이슨대학에서 위안부 피해 역사를 알리는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달엔 3년의 노력 끝에 워싱턴 인근 애넌데일에 미국 내 다섯번째 소녀상을 세웠다. 19일 페어팩스 자택에 있는 조 대표를 전화로 만났다.
‘애넌데일 소녀상’이 미국에 온 게 2016년 11월이니 제 자리를 찾기까지 2년11개월이 걸렸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2016년 3월에 먼저 건립을 제안했어요. 상징성이 큰 워싱턴디시에 소녀상을 세우면 어떻겠냐고요. 버지니아만 해도 이미 페어팩스 카운티 청사 안에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나비벤치 조형물이 있거든요.” 그 뒤로 워싱턴시청사만 네 차례 찾았단다. “시 아시아태평양국장을 만나 디시 내 공원이나 차이나타운 쪽에 소녀상을 세울 곳이 있으면 자리를 내달라고 요청했어요. 꼭 미국 수도에 소녀상을 세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국장은 딱히 된다는 말도, 안 된다는 말도 안 하더군요. 그사이 국장도 바뀌었고요.”
2017년에는 버지니아 솔즈베리대 교정에 세우기로 하고 건립일까지 잡았으나 결국 무산됐다. “대학에서 소녀상을 학교에 세우게 돼 영광이라고 공식적으로 편지까지 보내왔어요. 학생들 역사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요. 그런데 나중에 안 된다고 해요.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처음 바랐던 곳은 아니지만 소녀상은 미국 수도 인근 한인촌에 자리 잡았다. “올해부터는 대책위와 우리 단체가 함께 소녀상 건립을 추진했어요. 올 광복절 때 창고에 있던 소녀상이 잠시 ‘워싱턴나들이’를 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애넌데일의 한 한인 건물주가 사유지를 내주셨어요.” 소녀상 옆 건물에는 ‘기억의 공간’도 마련했다. “작은 방 크기이죠. 소녀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배지나 팔찌도 전시해놓았어요. 인쇄업을 하는 한인이 자기 가게의 4분의 1 정도 되는 공간을 내주셨어요.”
제막식 뒤 소녀상에는 동포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소녀상이 보이는 곳에서 근무하는 분이 그래요. 내다보면 누군가 소녀상 앞에 있다고요. 한인들이 오가며 계속 소녀상을 돌봐주세요. 새똥도 닦아주고 비오면 우산도 씌어주고요.”
‘워싱턴 소녀상’ 건립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했다. 목표는 내년까지란다. “올해 초부터 시장실이나 대학, 교회 쪽을 통해 건립 부지를 알아보고 있어요. 학교가 가장 좋지만 이번에 해보니 사유지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는 12살이던 1990년 가족과 함께 미국땅을 밟았다. “5살, 13살 두 딸을 키우는 싱글맘입니다. 여행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요. 우버택시도 몰고 통역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 ‘통일 운동’으로 불렀다. “6월엔 미주동포전국협회(NAKA) 회원들과 함께 연방의회를 찾아 로 칸나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한국전쟁 종전 촉구 결의안’ 지지를 호소했어요. 지지 의원 수를 늘리기 위해 지난달에는 한인들이 날을 정해 지역구 의원에게 집중적으로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냈죠.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염원한다고요.”
‘한·일 위안부 합의’ 뒤 단체 설립
지난달 수도 인근 애넌데일에 소녀상
“건립 뒤 한인 발길 이어져 감동
워싱턴 내 건립도 내년 말 목표로
궁극적 평화는 미국 시민도 반길 일”
풍물패 활동하며 한반도 평화에 관심
이런 활동 배경에는 그의 남다른 한국 문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매주 월요일 풍물패 활동을 해요. 둘째 딸이 북 치는 걸 너무 좋아해 항상 데리고 다녀요.” 풍물은 92년 중학교 2학년 때 만났다. “고교생 선배들이 주축이 돼 우리문화나눔터라는 풍물패를 만들었어요. 미국 학교에는 인터내셔널 데이라고 다문화 학생들이 장기 자랑하는 행사가 있어요. 사물놀이를 배워 공연하려고 풍물패를 만들었죠. 풍물을 하며 자연스레 재미동포의 정체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92년에는 엘에이 폭동도 있었어요. 그때 백인과 흑인 사이에 낀 한인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죠. 그 뒤로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온 선배들에게 이민사나 한국 근현대사를 배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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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는 미국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고국을 찾아 미군 사격터가 있던 매향리나 한국전 민간인 학살의 비극적 장소인 노근리 등을 둘러봤다. “그때 처음으로 광주에서 대규모 집회도 봤어요. 통역을 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민 1.5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004년과 2005년엔 한국에서 전문 풍물 강습도 받았단다. “2004년에는 광주에 석달 머물며 배웠어요. 이듬해는 임실 필봉 농악 강습을 3주 받았죠.”
원래는 장고 전문이지만 지금은 꽹과리를 잡고 있단다. “풍물패 10명 중 20대가 가장 많아요. 입양아도 두명이고요. 부채춤이나 살풀이는 공연하려면 오래 배워야 하는데 풍물은 쉽게 배워 직접 해볼 수 있어 많이 좋아해요.”
태평양 건너 미국에 사는 한인에게 한반도 평화란 어떤 의미일까. “저도 한국 사람이잖아요. 한국에 뿌리가 있고요. 지금도 미국인들은 저한테 남한이냐 북한이냐고 물어요. 분단된 나라여서죠. 전쟁 위험이 없는 것은 미국 시민의 입장에서도 반길 일입니다. 미국이 군사비로 돈을 많이 쓰잖아요. 내 세금이 나가는 것이죠. 궁극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그는 미국 정치인들에 대한 한반도 평화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미국에서 풀뿌리 통일운동을 하는 한인들 사이에 지금의 북-미 관계가 지속하면 2년 전 트럼프가 분노와 화염을 말한 시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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