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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이슈 미술의 세계

최초의 여성 전업작가가 꿈꾼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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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크리스틴 드 피장의 <숙녀들의 도시> 삽화, 작가 미상, 1405년 무렵, 프랑스 국립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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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24. 작가 미상, 책 ‘숙녀들의 도시’ 삽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조롱이 횡행하는 한국에서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Girls supporting girls)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여자 연예인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했던가. 15세기 중세 프랑스 사회에도 그런 각별한 여성이 있었다. 여성을 사악한 유혹자로, 변덕스럽고 무능한 존재로 그렸던 당대의 여성 혐오에 맞선 작가. “수많은 공격으로부터 여성들을 방어해주는, 튼튼한 요새를 만들어주기 위해 책을 썼다”고 당당히 밝혔던 사람. 바로 크리스틴 드 피장(1364~1430년께, Christine de Pizan)이다.

136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드 피장은 아버지가 샤를 5세의 궁정 의사가 되면서 4살 때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16살에 궁정 서기인 청년과 결혼했으나 10년도 안 되어 남편이 사망하는 불운을 맞았다.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세 명의 어린 자녀와 어머니 그리고 조카딸.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드 피장은 1394년께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성이 문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드 피장은 그렇게 ‘최초의 여성 전업작가’가 되었다.

다행히 그녀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곧 서정적인 발라드로 이름을 크게 알렸고, 1400년쯤에는 그 명성이 외국에까지 널리 퍼질 정도였다. 문제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이내 비방이 나돌기 시작했다. 여성이 그렇게 훌륭한 글을 썼을 리 없으니, 드 피장이 남성 학자나 성직자에게 돈을 주고 대필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상모략의 피해자였기에, 드 피장이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항하는 글을 쓴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1405년 드 피장은 자신을 화자로 등장시킨 소설 <숙녀들의 도시>를 쓴다(삽화 작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드 피장은 여성을 혐오하는 내용의 베스트셀러 <마테올루스의 탄식>을 읽으며 심란해하다가 깜박 잠이 든다. 작가 미상의 삽화에 묘사된 드 피장 바로 앞에 놓인 책이 <마테올루스의 탄식>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 앞에 거울을 든 이성, 자를 든 공정,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이 나타난다. 여신들은 놀라 일어선 드 피장을 진정시키고, 마테올루스의 잘못된 주장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며 위로한다. 동시에 드 피장에게 여성을 보호해주는 철옹성 같은 책을 쓰도록, 즉 ‘숙녀들의 도시’를 건설하도록 신이 그녀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계시를 받은 드 피장은 삽화 오른쪽에 묘사된 대로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친애하는 자매들’을 지켜줄 ‘피난처’의 초석을 놓기 시작한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가며 드 피장은 여신들과 대화를 이어가는데, 그 내용이 이 책의 핵심이다. 여신들은 ‘남성들의 여성 비하가 잘못된 이유’를 묻는 드 피장에게 명쾌하게 답을 내준다. 예컨대 ‘왜 여성의 지식이 남성보다 더 적냐’는 드 피장의 질문에 이성의 여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딸을 아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보내는 습관이 확립되고 자연과학을 배울 수 있게 된다면, 딸도 예술과 학문의 모든 세부 내용을 아들처럼 철저히 익힐 것이다.”

‘숙녀들의 도시’가 건설된 지 600년이 지났다. 이 도시는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한때 폐허가 되기도 했다. 이제 곳곳의 허물어진 벽을 보수하고, 도시를 다시 발전시키는 것은 드 피장의 후배인 우리의 몫이 아닐까 싶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에 나오는 대사처럼, 서로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막 나대라”고 격려해주는 것. 가부장제에서 상처받은 여성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주는 것. 그렇게 얻은 힘으로 다시 사회 속으로 뛰어들 수 있게끔 서로가 든든한 울타리,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제방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21세기판 ‘숙녀들의 도시’일 것이다. 여성들은 서로의 힘이며, 서로의 용기니까.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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