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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20대 청춘 다 바쳐도…‘언젠가 떠날 이’로 인식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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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닷모요가 지난 8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외국인주민지원본부에서 열린 태권도 교실에서 정권 지르기 연습을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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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저녁 퇴근길. 인도네시아 출신 닷모요(29)의 발길이 분주해졌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 8시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에 있는 안산외국인주민지원본부(외국인본부)에서 태권도 수업이 있는 날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퇴근 뒤 수업 시간을 겨우 맞춰 강당에 도착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흰 도복으로 갈아입은 닷모요가 검은 띠를 허리에 졸라맸다. 자세를 가다듬더니 허리를 곧게 펴고 외쳤다. “전체 차렷! 사범님께 인사!”



닷모요는 안산시와 시흥시에 걸쳐 조성된 시화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다. 2014년 11월 한국에 온 뒤 배수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다. 닷모요는 외국인본부를 찾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성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성격 덕인지 닷모요는 4년10개월간의 첫 체류를 마친 뒤 재취업 기회를 얻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의 닷모요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내년 10월이면 정든 한국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19살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한국에 와 20대 청춘을 고스란히 이 땅에서 보냈지만, 한국은 닷모요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실함도,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도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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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사범 박민현(왼쪽 첫째)씨와 수강생들이 지난 8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외국인주민지원본부 태권도 교실에서 태극기를 펼쳐 들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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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모요의 한국 생활을 규정하는 건 그가 가진 비전문취업(E-9) 비자다. 비전문취업 비자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이들에게 발급되는 비자로, 최대 체류 기간이 10년이다. 한국에 더 머무르기 위해서는 장기 체류가 가능한 전문인력(E-7) 비자가 필요하지만, 체류 기간이 1년4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닷모요가 비자 변경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단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안산에는 닷모요와 비슷한 처지의 이주민이 많다. 2024년 3월 기준 안산에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민이 모두 1257명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닷모요와 같은 비전문취업 비자는 1073명(85%)에 이른다. 전문인력 비자는 단 76명(6%)뿐이다. 영주권자는 1명도 없다.



전체 이주민을 보면 그 비율은 더 떨어진다. 안산 전체 외국인 9만6895명 중 전문인력 비자를 가진 이는 1.01%(977명)뿐이다. 평일은 물론 주말까지 바쁘게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를 배워 자격시험에 통과하고 복잡한 비자 변경 절차를 밟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닷모요 역시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태권도 연습에 매진하는 것도 인도네시아에 돌아가면 태권도장을 차리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한국과의 끈을 이어가려는 몸부림이다.



태권도 수업이 열린 지난 8일 외국인본부 3층 대강당에 모인 이주배경주민은 11명. 베트남, 인도네시아, 탄자니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출신도 제각각이다. 고려인, 결혼이주여성, 중도입국청소년, 이주가정 자녀, 이주노동자 등 사연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태권도 앞에서 차이는 무의미했다. 품새를 연습하고 발차기를 단련할 때는 프로 선수만큼 진지했지만 수업 내내 웃음과 격려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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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수강생들이 지난 8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외국인주민지원본부 태권도 교실에서 품새를 익히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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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이들 사이에는 출입국 제도가 강제하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이들이 허리에 두른 흰색,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띠와는 달리 실제로 이들의 삶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어떤 비자인지, 어느 나라 출신인지, 한국과 혈통적 연관성이 있는지에 따라 체류 가능 기간과 종사 가능 업종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촘촘하게 짜인 차별에 가까웠다. 그 결과 이들이 가진 꿈의 빛깔도 달라졌다.



이날 함께 수업을 들은 박아나스타시아(10·안나)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다. 아버지 박로만(38)과 어머니 원스베틀라나(37)는 각각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으로 이들 가족은 재외동포(F-4) 비자를 갖고 있다. 재외동포 비자 역시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없다는 등의 제약이 있지만, 체류 기간에 제한이 없고 3년마다 비자를 갱신하면 계속 한국에 머무를 수 있다. 덕분에 안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의 미래를 그릴 수 있다. 태권도를 배우는 이유도 “한국에서 경찰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원스베틀라나는 임신 7개월이다. 곧 태어날 둘째 아이다. 원스베틀라나는 “저희는 고려인이어서 좋은 비자를 받고 올 수 있었다”며 “우리에게 한국은 정말로 기회의 땅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살 계획”이라고 했다.



닷모요와 안나의 가족이 마주한 서로 다른 현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순혈주의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한국에서 지내며 지역사회에 기여한 시간이 더 길더라도, 이주노동자로서 한국에 온 닷모요는 이 벽을 넘기 어렵다. 20대를 한국에서 보내며 이 땅에서의 미래를 꿈꿨지만 그는 여전히 ‘머무를 이’가 아니라 노동을 마친 뒤 ‘떠날 이’로 인식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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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박아나스타시아(가운데)와 엄마, 아빠가 지난 8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외국인주민지원본부에서 열린 태권도 교실에서 엄마가 찍은 딸의 태권도 연습 영상을 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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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사는 안산시는 지방자치단체 중 이주민 포용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편이다. 전국 지자체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인지원팀을 본부로 승격했고, 태권도 교실을 비롯해 케이팝 댄스 교실, 배구 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호평을 받는다. 매해 5월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이주민 행사인 ‘세계인의 어울림 한마당’ 축제도 연다. 이런 노력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더해져 다양성의 공간으로 안산을 조명하는 언론도 늘어났다.



그러나 정작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닷모요는 10년 동안 한국에 있었지만 “한국 친구는 1명도 없다”고 했다. 안산에서 18년을 산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 윤민정(38)씨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보다 지금 양쪽 사이가 더 멀어졌다”며 “서로 간에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는데 외국인 수만 계속 늘어나다 보니 오히려 더 가까워지기가 힘들어졌다. 닷모요 같은 친구들은 일이 바빠서 더 심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계속 양쪽 사이 거리가 멀어지는 이유는 뭘까? 안산 지역 활동가들은 이주민을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제도와 인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쓴 이주민 인권 활동가 정혜실 단원에프엠(FM) 본부장은 “한국의 법은 이주노동자의 직업 선택 자유도 보장하지 않고 이 틀에서 벗어나면 불법 딱지를 붙인다. 그들을 꿈을 가진 인간이 아닌 값싼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한국의 인종차별적 제도 속에서 진짜 공존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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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다문화거리 풍경. 윤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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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안산은 과거부터 이주민의 도시였다. 박정희 정권의 수도권 산업단지 조성 계획으로 1977년 반월공업단지가 들어섰고, 이후 1986년 시화공업단지가 추가로 생겼다. 공단은 경제 발전과 함께 성장했고 1986년 반월지구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한 뒤 인구가 급속도로 늘었다. 2011년 발간된 ‘안산시사’를 보면, 안산 지역 인구는 1985년 4만389명에 불과했지만 1990년에는 25만2157명이었다. 늘어난 인구 21만명은 대부분 다른 도시에서 온 이주민들이었다.



공단 도시로 출발했던 안산도 이후 변화를 겪었다. 2006년 인구 70만명을 넘겼지만, 사회·경제 구조가 바뀌며 내국인 노동자들이 공단을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국외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채웠다. 외지인이 와서 일하고 경제를 지탱한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안산 주민으로 여겨졌던 국내 이주민과 달리, 안산에 있는 114개국 출신 이주민들은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여전히 안산 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태권도 수업이 끝난 뒤 한국에 계속 있고 싶지 않으냐고 닷모요에게 물었다. 그는 “사실 지금도 정말 한국에 남고 싶다”고 했다. 닷모요는 “체류 기간 성실하게 한국에서 일한 노동자들에게는 한국어 시험 성적과 상관없이 장기 체류할 기회를 주면 좋겠다”고도 했다. 도복 왼쪽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듯, 한국을 위해 10년을 일해온 한 청년 노동자의 꿈이었다. 그가 말했다. “저도,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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