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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전합, "정당하지 않은 증언 거부에도 검찰조서 증거인정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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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 자리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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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를 거부하기로 판단했기 때문에 선서를 거부합니다”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이런 이유로 증언을 거부했다면 이 사람의 수사기관 조서는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본 원심을 확정하고 상고를 기각했다.



증언거부한 증인



A씨는 돈을 받기로 하고 B씨에게 필로폰을 교부해 매매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B씨는 A씨의 범행과 관련해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B씨 본인 역시 필로폰 관련 다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A씨 사건 1심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B씨는 증언을 거부했다. 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자신의 재판과도 관련 있다는 이유였다. 형사소송법 제148조는 누구든지 자기나 친족이 형사소추 또는 유죄 판결을 받을 사실이 발로될 염려가 있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B씨의 증언 거부로 범죄의 증명이 안 된 A씨는 무죄를 받았다.

항소한 검찰은 2심에서도 B씨를 증인으로 불렀다. 그 사이 B씨의 재판이 끝나 확정됐다. 검찰은 A씨 사건의 공소장 내용을 일부 바꿔 B씨가 증언을 거부할만한 소지를 줄였다. 그런데도 B씨는 두 차례나 법정에 나와 증언을 거부했다. 항소심에서는 'B씨가 정당한 이유 없이 증언을 거부했을 때도 B씨의 검찰 조서를 증거로 인정할 수 없는지'가 쟁점이 됐다. 기존 판례는 1심처럼 정당한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증인의 검찰 조서의 경우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봤다. 문제는 2심 때처럼 정당하지 않은 증언거부의 경우인데, 이에 대해선 명확한 판례가 없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경우에도 B씨의 검찰 조서를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보고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런데 다른 하급심에서 엇갈린 결론들이 나왔고, 이번에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하게 된 것이다.



검찰조서, 재판 증거 되려면



어떤 사람이 검찰이나 경찰 조사에서 피의자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고 조서를 썼더라도 이를 그대로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재판에서는 진술한 당사자를 공개 법정에 불러 수사기관 조사 당시 진술한 내용이 진정으로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이미 검찰 조사에서 A씨 범행에 대해 일부 진술한 B씨를 A씨 재판에 다시 증인으로 불러 세우는 이유다. 우리 형사소송법이 추구하는 직접심리주의와 공판중심주의에 따라 공정한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와 무죄 추정을 받을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거나 무너뜨리는 결과가 초래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또 대질신문 없이 참고인 진술만 담긴 수사기관 조서와는 달리 공개 재판에서는 피고인측이 증인에게 직접 반대신문을 할 수 있어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측면도 있다.

예외도 있다. 형사소송법 제314조는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예외 사항 몇 가지를 정했다. 수사기관 조서를 확인하러 재판에 나와서 진술해야 하는 사람이 사망ㆍ질병ㆍ외국 거주ㆍ소재 불명 또는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해 진술할 수 없을 때는 그 조서나 그 밖의 서류를 증거로 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검찰 측은 B씨가 정당한 이유 없이 진술을 거부한 것을 형소법 314조가 정하는 ‘이 밖에 준하는 사유로 진술할 수 없을 때’로 보고 B씨의 검찰 조서를 증거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전합은 검찰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 ‘반대신문권’ 보장



전합 다수의견(12명)은 “증인이 정당하게 증언거부권을 행사했든 아니든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판결했다. 증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증언을 거부한 것을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예외사유로 본다면 “참고인이 수사 과정에서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진술을 해놓고 나중에 법정에서 증언을 거부하는 경우 오히려 죄가 없는 피고인이 억울하게 처벌을 받게 되는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전합은 “이 경우 실효적인 제재수단을 도입하거나 증인 보호제도를 정비하는 등 관련 법령의 제ㆍ개정을 통해 증언을 유도하는 방법을 강구해야지, 예외 규정의 적용 범위를 넓혀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다만 다수의견은 “피고인이 증인의 증언 거부 상황을 초래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형소법 314조를 적용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추후 파장은



이날 전원합의체 판결이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상옥 대법관은 “증언거부권이 없는 증인은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고, 이를 위반하면 위증의 벌을 받는데 이를 정당한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경우와 같게 볼 수는 없다”는 별개의견을 제시했다. 또 다수의견을 따를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짚었다. 박 대법관은 ▶현재 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에서 피고인이 증인을 상대로 증언을 거부해줄 것을 회유ㆍ협박하는 현상이 생길 우려 ▶형사소송법이 규정하는 증언 의무가 하루아침에 거래의 대상이 될 우려 ▶성폭력 범죄에서 증언을 거부하게 해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한 시도가 횡행하게 될 우려 등을 제시했다.

검찰 수사 및 재판 과정이 쉽지 않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검찰 출신의 신병재 변호사(법무법인 이헌)는 “마약 사건처럼 증인 진술이 유일한 사건이거나 조폭 사건처럼 증인이 보복을 두려워해 증언하기 어려울 수 있는 사건의 경우 검찰이 혐의 입증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청장을 지낸 김종민 변호사(법무법인 동인)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우리나라는 진술에 의존해 수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참고인 진술을 무력하게 하기 쉬운 구조가 되면 형사소송법을 따르다 범죄자 처벌이 어려워지는 주객이 전도된 모양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강압ㆍ회유를 통한 진술이 유죄 증거로 쓰이는 것을 막자는 증거법의 취지를 잘 살리려면 통신감청을 광범위하게 인정한다든지, 계좌 추적을 폭넓게 인정한다든지 등의 예외조항으로 보완책도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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