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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가미가제·오노다 히루… 75년 전 '레이테만 해전'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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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국방부, 1944년 10월 벌어진 레이테만 전투 75주년 기념 / '가미가제'로 알려진 자살 특공대 첫 출현… 공포에 빠진 美 / 日軍 오노다 히루 소위, 30년간 항복 거부하다 1974년 투항

세계일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의 미 육군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가운데)이 1944년 10월20일 부하들과 함께 필리핀 레이테섬 해안에 상륙하고 있다. 미 육군


다음달 할리우드 영화 ‘미드웨이’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일본군이 태평양에서 벌인 해전에 대중의 이목이 쏠린다.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전투가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기를 잡는 계기가 됐다면 1944년 10월23일 시작해 26일까지 나흘간 이어진 레이테만 전투는 미군이 일본군의 숨통을 끊어놓은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미 국방부는 23일(현지시간) 레이테만 전투 75주년을 맞아 2차 대전 당시 최대 규모 해전이었던 이 작전의 전모를 상세히 소개하는 글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레이테만은 섬나라 필리핀을 구성하는 여러 섬들 중 레이테섬의 동쪽에 있는 만(灣)이다. 2차 대전이 종반으로 치닫던 1944년 10월 이곳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1940년대 초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국은 아니고 미국의 자치령으로서, 지금의 푸에르토리코와 비슷한 법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1941년 12월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이듬해 필리핀을 공격해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무찌르고 필리핀을 점령했다.

당시 필리핀 주둔 육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I shall return)”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필리핀을 떠나 호주로 옮긴 다음 일본을 상대로 설욕을 다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44년 10월 당시 미 해군은 필리핀보다는 역시 일본의 지배 하에 있던 대만을 더 공격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미 육군을 이끌던 맥아더 장군이 “미국이 필리핀 국민들한테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필리핀 공격을 강하게 주장해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일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필리핀 남부의 한 섬에 들어갔다가 30년 만인 1974년에야 발견돼 구출된 오노다 히루 소위가 일본에 도착해 환영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레이테만 전투에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4척을 포함해 총 26척의 군함을 잃었다. 미 해군의 피해 규모는 항공모함 3척을 비롯해 7척에 그쳤다. 미군은 육군과 해군을 더해 2만3000여명이 전사한 반면 일본군은 무려 41만9000여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해전은 흔히 ‘가미가제(神風)’로 불린 일본군의 자살 특공대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궁지에 몰린 일본이 일부 조종사로 하여금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미국 군함에 그냥 부딪치게 하는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가미가제의 출현은 미군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저런 지독한 국민이 사는 일본이란 나라를 완전히 점령하려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까’라는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힌 미국 정부는 결국 원자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참패하고 이듬해 9월2일 미군 등 연합군에 정식으로 항복한 뒤에도 필리핀 남부의 한 섬에 숨어 있던 오노다 히루 소위는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밀림 속에 남았다. 누구도 그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려 30년간 밀림 속에서 버틴 오노다 소위는 1974년 그의 옛 상관이 섬에 가서 “전쟁은 끝났다. 그만 항복해라”라고 말한 뒤에야 비로소 밀림 밖으로 걸어나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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