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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30] 惡名이 주는 강력한 쾌감, 그리고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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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규나 소설가


담장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어떤 저항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유동적이었지만 이내 끈적거리기 시작했고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마다 점점 더 단단해졌다. 몸 전체가 마침내 벽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더 밀고 나갈 수 없었다. 그는 꼼짝없이 엉겨 붙어 벽 속에 갇혀버렸다. 지금도 그는 화석이 된 채 그 벽 속에 있다.

ㅡ마르셀 에메 '벽으로 드나드는 사나이' 중에서.

소심했던 하급 공무원 뒤티유윌은 어느 날, 벽을 통과하는 능력이 생긴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기를 괴롭히던 과장을 골려주려고 벽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협박과 욕설을 내뱉는다. 벽에 걸린 짐승의 박제된 머리처럼 부하 직원 얼굴이 반복해 나타나자 겁을 먹은 상사는 끝내 정신병원으로 실려 간다.

현실과 환상을 버무린 작품들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가 1943년에 내놓은 단편소설 '벽으로 드나드는 사나이'의 기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주인공은 도둑질로 영역을 넓혀 가는데 악명이 높아질수록 대중의 찬사도 커진다는 사실을 알고 쾌감을 느낀다. 그는 더욱더 과감한 범죄를 일으키고 일부러 체포되어 존재감을 과시한다. 교도소 담장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사회를 기만하는 건 물론이다.

조선일보

죄가 클수록, 범죄자가 뻔뻔할수록 그를 동경하고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나는 건 세계 공통일까. 신출귀몰하는 도둑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훔쳐 가주길 열망하는 여성들마저 생기자 그는 매력적인 유부녀와 밀회까지 나누게 된다.

행운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던 어느 새벽, 그는 벽 속에 갇히고 만다. 두통 치료제인 줄 알고 낮에 먹은 약이 1년 전 사놓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없애주는 약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바람 부는 밤이면 짧은 행복과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흐느낌이 그 담장 부근에서 들린다나.

범죄가 영웅적 행위로, 범죄자가 희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시대다. 하지만 법의 담장을 제멋대로 넘나들며 당장은 세상을 호령한다 해도 언젠가 그 벽 속에 갇혀 흐느끼는 날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김규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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