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신문 마쓰이 야요리와 함께
국제여성법정서 세기의 판결 받아내
12개국 여성 희생자 기림비 세우며
한일 넘어선 전시 성범죄 보편성 강조
“일본에 속아 끌려온 한반도 여성들
피해자 동의없는 국가정상 간 합의
해결도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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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이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과 전쟁의 문제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잔혹했던 36년 식민통치의 아픔을 고발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상징’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오랜 시간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며 현실참여 활동을 해온 여성운동가인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공동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전시 여성에 대한 범죄’라는 위안부 문제의 보편성이다. 그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초청으로 22일 열린 ‘2000년 여성국제법정’ 19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21일 방한해 <한겨레>와 만났다.
“저는 원래 말레이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1990년대에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집회를 열었는데 말레이시아 기자에게 집회를 취재해보라고 권했죠. 그 기사가 마침 현지 신문 1면에 실려서 말레이시아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중에 로자린 쏘우라는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할머니를 만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친해진 뒤 제 ‘대모’가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저와 위안부 문제의 시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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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나카하라 교수는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마쓰이 야요리(1934~2002) <아사히신문> 기자와 함께 세기의 재판에 나서게 된다. 2000년 12월8일부터 사흘간 열린 ‘여성국제법정’이란 이름의 민간 법정이었다. 그는 “당시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아서 이를 다른 일본인들에게 알리고 전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마쓰이는 달랐다”고 말했다. “갑자기 마쓰이가 ‘위안부 문제는 여성에 대한 국가와 일본군의 범죄’라며 이를 (확인하는) 재판을 하자고 했어요. 우리는 그런 재판이 가능할까 몹시 두려웠지만, 어쨌든 시작을 한 거죠. 마쓰이는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카하라 교수 등은 재판 실무 준비를 위해 1998년 6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너무 많았다. 가장 큰 두려움은 전쟁의 최고 책임자이자 군 통수권자였던 히로히토 일왕을 법정에 올린다는 사실이었다. 재판을 주도한 마쓰이 등에게 우익의 협박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동안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더욱이 아시아 각국에 흩어진 피해자들을 도쿄로 불러 모으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끈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총 64분의 피해자를 증인으로 법정에 불렀습니다. 할머니들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가족이나 운동가들이 최소 2명 정도는 붙어야 했어요. 항공료와 체재비, 통역·번역비 등도 필요했어요. 중간에 ‘내 퇴직금을 부어야 하나’란 생각도 했지만, 일본의 한 고령 여성이 ‘천황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거액을 기부하셨어요.”
이 민간 법정에선 위안부 제도에 책임이 있는 일왕 등 9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제도가 나치 시절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에 맞먹는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임을 명명백백하게 선언한 세기의 판결이었다.
그 뒤 나카하라 교수에게 또 하나의 전기가 찾아온다. 와세다대 박사과정의 제자 홍윤신(<오키나와 전장의 기억과 위안소> 저자)씨가 오키나와 위안소 조사 연구를 위해 미야코지마를 방문했다가 중요한 증언을 채록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는 홍씨에게 12살 때 섬에서 피부가 하얀 조선인 여성들이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우물에 들렀다 잠시 쉬던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자기 섬에 왔다가 전쟁 뒤 사라진 누나들이 누굴까 의아해하던 요나하는 이후 그들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조사 결과 미야코지마에만 총 17곳의 위안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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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소에 위안부 여성들을 기억하는 비를 만들고 싶다는 요나하의 얘기를 들은 홍씨는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 윤정옥(94) 선생과 나카하라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나카하라의 주도로 시민 모금이 이뤄져 2008년 9월7일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희생자가 된 12개국 여성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해 12개국 언어로 비를 새겼다. 비의 이름은 ‘여성들에게’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와 군이 저지른 ‘국가 범죄’임을 부인하려는 한·일 양국의 사회 분위기에도 일침을 놨다. “규슈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산부인과 의사였던 아소 데쓰오(1910~1989)라는 의사가 1937년 11월 군에 소집이 됩니다. ‘나는 부인과 의사인데 왜 소집을 할까’ 의아해하던 그가 상하이에 도착해 보니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아소는 군으로부터 그곳에 있던 여성 100여명의 신체검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일기에 ‘일본인 위안부들은 성매매를 해본 이들이었지만, 한반도 출신 여성들은 성경험조차 없어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적었다. 나카하라는 “(한반도 출신 여성은) 좋은 일거리가 있다고 속여서 끌고 온 것이다. 이는 사기다. 성경험이 없는 여성이 어떻게 위안부가 되기 위해 오겠냐”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한·일 양국 정부의 2015년 12·28 합의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국가 정상끼리 한 합의는 해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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