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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쓸 일이 없어서…" 방범봉도 없이 대사관저 지킨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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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력화되어 가는 경찰 공권력

시위대 19명이 사다리 2개 들고 경비 초소 지나갔지만 무사 통과

배낭 메고 담 넘는데도 시위대 안전 위해 사다리 손 안대

경찰, 뒤늦게 경비 인력 늘리고 체포한 19명 중 9명 영장 신청

18일 친북(親北) 단체의 주한 미국 대사관저 집단 난입 당시, 현장에 출동한 20대 남성 의무경찰 3명은 최소한의 범행 제압 도구인 경찰봉(棒·일명 '방범봉')조차 휴대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시위대 남자 2명과 여자 1명에게 제압당해 월담을 허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법상 빈(Wien) 협약 서명 국가는 자국(自國) 내 공관 지역에 대한 침입, 손해, 품위 손상 등을 방지할 '특별한 의무'를 진다. 하지만 이러한 의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려는 의지가 경찰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조선일보

여성회원 1명에게 붙잡힌 경찰 2명 - 지난 18일 서울 중구 주한 미국 대사관저로 담을 넘어 침입하려던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의 여성 회원(맨 왼쪽)이 이들을 저지하려는 경찰을 뒤에서 잡아당기고 있다. /페이스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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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이 인터넷에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당시 시위대 19명이 철제 사다리 2개를 동원해 서울 중구 미 대사관저 담장을 넘기 시작한 직후 주위를 순찰하던 의경 3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전원 비(非)무장 상태였다. '경찰 장비 사용 규정'에 따르면, 경찰은 불법 집회·시위로 재산·공공시설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봉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의경들은 경찰봉을 휴대조차 하지 않았다. 남대문서 측은 "최근 대사관저 경비 과정에서 경찰봉을 쓸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휴대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려둔 상태였다"고 밝혔다.

맨몸으로 시위대 앞에 선 의경 중 1명은 남성 시위자 단 1명에게 제압당했다. 다른 의경 2명은 남성 1명과 여성 1명에게 옷을 붙잡힌 채 좌우로 휘둘리느라 월담을 제지하지 못했고, 가까스로 빠져나와 무전기로 지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의경을 완력으로 제압하던 현행범 가운데 1명은 이후 지원 경찰 수십 명이 도착한 상태에서도 20분 가까이 주위를 맴돌며 경찰을 비난하고 반미(反美) 구호를 외쳤다. 의경들은 이 모습을 지켜만 봤다.

조선일보

20일 오후 서울 중구 주한 미국 대사관저 주변에서 경찰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친북 단체의 관저 난입 사태가 벌어진 다음 날인 지난 19일 경찰청은 "주한 미국 대사관저 주변 경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의 경찰이 들고 있는 것은 안내용 경광봉이다. /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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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대사관저 담벽이 시작되는 초입에 경비를 세워놨지만, 시위대 수십 명은 철제 사다리 2개를 들고서도 이 지점을 무사 통과해 관저 정문 부근까지 갔다. 경비 책임자인 김인병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은 "불심검문을 할 만했는데도 안 한 것은 사실"이라며 "당시 의경이 왜 검문을 안 했는지 이유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

시위대 가운데 여러 명은 등에 배낭을 메고 담을 넘었다. "흉기나 위험물은 소지하지 않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이들이 사용 중인 사다리를 적극적으로 치우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시위대가 다칠까 봐 무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의 미 대사관저 경비 실패는 최근 1년 남짓한 기간에만 두 번째다. 작년 9월 40대 중국 동포 여성이 담을 타고 넘어 들어갔고, 수 시간이 지나서야 내부 경비원에게 발견됐다. 당시 경찰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징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은 이번 현장에서 체포한 19명 중 9명에 대해 공동 주거 침입, 공무집행 방해,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19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나머지 10명은 묵비권을 행사하는데도 약 30시간 만에 풀어줬다. 형법상 현행범으로 체포된 경우 48시간 동안 유치장에 구금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경찰 관계자는 "가담자들은 엄정하게 수사하고, 대사관저 경비도 강화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20일 미 대사관저 경비를 서는 의경들은 여전히 경찰봉을 휴대하지 않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19일(현지 시각) 주한 미 대사관저 난입 사건에 대해 "한국이 모든 주한 외교 공관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할 것을 촉구(urge)한다"는 논평을 냈다.

현 정부 들어 공권력 무력화가 가속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경찰 조직 내에 외부인 참여 조직인 '개혁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그해 9월 '집회·시위 자유보장을 위한 권고'를 내놨다. ▲시위 진압용 살수(撒水) 차량 사용 제한 ▲시위에 대한 차벽(車壁) 설치 원칙적 금지 ▲집회 시위 참가자에 대한 교통방해죄 적용 금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를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이 전면 수용했다. 이 전 청장은 "인권 경찰로 거듭나기 위해서"라고 했다. 경찰은 그로부터 1개월 뒤에는 백남기씨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한 대응을 중단하고 유족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도 했다. 백씨는 2015년 폭력 집회에서 경찰 버스를 넘어뜨리려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뒤 숨진 사람이다.

[곽래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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