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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허연의 책과 지성] 앤드루 포터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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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어떤 기억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가슴 시리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다. 기억 때문에 아프고 기억 때문에 살게 된다. 최근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고 떠오른 생각들이다. 그의 소설은 환희에 들뜬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삶의 비의(悲意)를 그려내지만 이상하게도 읽는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힘이 있다. 포터의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문학동네)에 실려 있는 단편 '폭풍'의 한 대목을 보자.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결혼에 실패하는 등 이런저런 일로 실의에 빠진 남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하는 이 장면을 읽으면 콧날이 시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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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는 이제 40대 후반의 젊은 미국 소설가다. 뉴욕 바사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그는 2008년 펴낸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주목받는다.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주목한 가장 큰 이유는 기억를 다루는 솜씨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서른 살 연상의 물리학교수 로버트와 사랑에 빠진 제자 헤더의 이야기다. 둘의 사랑은 육체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둘은 물리이론과 삶을 이야기하고 글렌 굴드의 음악을 듣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로버트는 주인공 헤더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간다. 서로에게 몰입하게 된 둘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당신이 언젠가 이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이렇게 말하는 로버트의 눈을 바라보며 헤더가 대답한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이루기 힘든 사랑에 빠진 헤더로서는 차라리 로버트가 미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최후의 대책일지도 모른다.

헤더에게는 또래 연인이 있다. 건장하고 젊은 의대생이자 수영선수인 콜린이다. 헤더와 콜린의 관계는 육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잠자리를 하면서 젊음을 만끽한다. 그리고 둘은 결혼을 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로버트를 지운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마음속 어딘가에 로버트의 자리는 분명히 남아 있다. 콜린은 도저히 채워줄 수 없는….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헤더는 로버트가 림프 종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헤더는 몰래 속 깊은 울음을 쏟아낸다.

"시간을 회상하노라면. 나는 우리 사이의 일들이 끝나기 직전의 어느 날 저녁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왜 소설 제목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일까. 작가가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 로버트는 '빛'(이상)을, 콜린은 '물질'(현실)을 상징하는 것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 빠진다는 건, 그가 내 마음에 들어와 어떤 좌표를 차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사람마다 차지하는 좌표가 다르다. 어쨌든 그것들은 기억의 이름으로 마음에 각인된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일들은 분명히 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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