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반도로 이주한 중국인 이주사
아편, 주석, 고무산업 열쇳말로 분석
아편과 깡통의 궁전
강희정 지음/푸른역사·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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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이환(?~1826)
거부가 된 망명객. 중국 푸젠성에서 태어났다. 반청운동 ‘천지회’ 활동으로 탄압받아 타이로 망명하고 교역업에 종사했다. 말레이반도 북부에서 무역과 후추농원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았다. 1786년 영국이 무단점거한 직후의 말레이 북서쪽 페낭으로 이주해 1787년 화인사회의 수장(카피탄 치나)에 임명됐다. 당국으로부터 아편과 술(아락) 전매권을 얻음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았고, 페낭 최고의 명문가를 일궜다.
#키닌(1868~?)
자수성가한 쿨리(중국 노동자). 광둥성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주석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말레이반도 페락으로 왔다. 한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났던 또래 친구들 역시 광부로 일하다 모두 각기병에 걸려 숨졌다. 아편을 하지 않고 돈을 모았던 키닌은 5년 뒤 자신의 주석광산을 열고 중국계 현지인 여성과 결혼했다.
#커심비(1856~1913)
유럽과 상전(商戰)을 벌인 기업인·관료. 타이에서 중국인 광산 거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푸젠성에서 유학을 공부한 뒤 타이로 돌아와 푸켓의 최고 행정관에 올랐다. 타이 국적을 취득했으나 페낭의 화인사회와 힘을 합쳐 해운·제련·금융·광산업을 선진화시켜 영국과 네델란드의 경제공세에 맞대결을 펼쳤다.
#참윗호(?~?)
‘성노예’가 된 화인 소녀. 1870년대 중국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12살에 150달러에 팔려 페낭으로 왔고 다시 400달러에 팔려 4년간 매를 맞으며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1889년 그와 사랑에 빠진 한 중국인 남성이 경찰에 제보해 가까스로 ‘매음굴’에서 빠져나왔다.
#우롄테(1879~1960)
페낭의 개혁운동을 이끈 의사. 광둥성 출신 이주자의 아들로 페낭에서 태어났다. 영국에서 유학하며 의학을 전공하고 1907년 청나라의 고위 무관 위안스카이의 초빙으로 중국에 건너가 만주 일대에 창궐한 페스트 방역에 성공했다. 중국인 최초의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1937년 페낭으로 건너와 동네 병원 의사로 여생을 보냈다. 아편반대운동 등 페낭 최초의 사회운동을 주도하다 영국 당국에 탄압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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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사를 전공한 미술사가 강희정(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이 이처럼 다양한 인생을 살다간 ‘화인’(華人·화교는 중국 ‘국민’이라는 뜻이 강한 반면, 화인은 ‘거주국’의 국민에 방점을 둔다)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동남아 현지에서 태어난 이주민의 후예를 가리키는 ‘페라나칸’들이 싱가포르에서 일군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 <싱가포르의 혼합문화, 페라나칸>(2013)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동남아 화인사회의 시각예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말레이시아 페낭을 답사하기로 했다. 페낭의 시내 ‘조지타운’은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페라나칸 문화의 정수라고 알려져 있기에 동남아 공부의 출발지로 삼았다.
페낭‘부터’ 시작했지만 결국 페낭은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고야 말았다. 페낭의 페라나칸 대다수를 이루는 중국계 이주민들의 역사는 캘수록 고구마줄기처럼 이어졌으며, 이야기의 잔가지는 페낭을 넘어 타이, 인도네시아, 인도,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번졌다. 그리고 이들 화인들 삶의 궤적은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에 톱니바퀴처럼 들어맞았다.
왜 페낭이었을까? 강희정은 페낭 화인들이 발전시켜온 고유한 정체성을 이유로 든다. 그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페낭 화인들은 인도네시아 등 다른 동남아 지역보다 훨씬 중국적 정체성이 강하다는 데서 차이점이 크다. 다른 나라들은 화인들에게 억압 또는 동화 정책을 썼으나 페낭은 애초부터 영국의 지배가 느슨했던 탓에 ‘화인 경제권’을 기본으로 문화적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의 화인들은 동남아 열대 기후 풍토에 따른 현지식 가옥을 짓는 반면, 페낭 화인은 출신지인 중국 남부 지방의 건축 양식을 취하며, 인테리어도 <삼국지>처럼 대중적인 중국 고전에서 모티브를 따온 그림·조각·유리 공예 등으로 장식한다. 중국인이 이주한 어느 도시든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페낭에서만큼은 찾아볼 수 없다. 도시 전역에 중국인들의 문화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따로 모여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강희정은 “동남아의 경제적 주도권은 화인들이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동남아 화인들의 역사를 농축적으로 담고 있는 페낭을 이해한다면 앞으로 동남아 교류의 열쇠를 얻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서 다룬 페낭의 역사는 인도~중국 교역항로의 거점으로 페낭을 점찍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단 점거(1786년)에서 시작한다. 자유무역항으로 키워나갔지만 영국 당국의 직할체제가 아닌데다 ‘해골정부’라 불릴 만큼 행정력도 느슨했다. 페낭 정부는 아편, 중국 술 아락 등 특정 품목을 독점판매하는 권리를 팔아 세원을 확보했다. 징세청부제(파밍 시스템)라 불리는 이 제도를 활용해 일부 발빠른 중국 화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아편이 핵심이었다. 페낭은 단지 아편교역항이 아니라 생아편을 흡입용 아편(찬두)으로 만드는 재가공시설을 갖추고 있어 동남아 아편경제의 중심지였고, 페낭의 일부 엘리트 화인들은 영국의 교활한 ‘아편식민지배’를 통해 톡톡히 이득을 봤다. 화인들은 출신지역지에 따라 경제적 동맹체 ‘비밀결사’를 조직해 서로 경쟁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9세기 중반 이후 양철과 깡통에 대한 전세계적 수요가 늘어나면서 말레이 북부의 주석광산도 붐을 이뤘다. 페낭 ‘큰손’들이 댄 자본, 중국 남부 남성들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 비밀결사를 통한 조직적 비호에 아편이 합을 이뤄 주석광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그러나 그 거위는 쿨리의 고혈로 피칠갑을 하고 있었으니, 페낭으로 오느라 뱃값을 빚지고 온 이들은 불어나는 부채를 감당하느라 허리가 휘어졌다. 외따로 떨어진 숙소에서 머무는 광부들은 광산과 아편전매를 겸한 부자들이 독점 운영하는 ‘광산매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엔 늘 이들을 유혹하는 아편이 있었다. 뙤약볕 아래 고되게 일하다가도 아편 몇모금만 빨면 몇시간은 쌩쌩하게 일할 수 있었다고 하니, 아편은 일종의 ‘노동 마약’이자 현실도피를 위한 환각의 계단이었다. 이처럼 아편과 주석에서 막대한 이윤을 취한 페낭의 부자들은 앞다퉈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거금을 시주해 호화찬란한 사찰을 세웠다. 20세기 초기 빛을 발한 페낭의 ‘벨 에포크’였다. 지은이는 이를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라 이름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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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팡코르조약을 통해 말레이반도 전역에 식민지배를 확장한 영국은 자유방임주의에서 개입주의로 정책을 바꾸고 페낭 화인권을 위협해왔다. 이들은 분할통치를 통해 화인사회 엘리트들의 영향력을 떨어뜨렸고 비밀결사를 불법화했으며, 1911년엔 화인 경제의 보루인 징세청부제를 폐지했다. 20세기 초 자동차산업이 번창하며 타이어 수요가 급증하자, 영국 자본은 말레이반도에 고무플랜테이션 농업을 들여와 ‘고무의 시대’를 열었다. “아편과 깡통의 페낭 화인권은 고무바퀴 아래 깔렸다.”
20세기 들어 물결을 이룬 중국 여성들의 대규모 이주는 화인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실상 인신매매를 통해 성매매에 발을 들인 여성들도 있었지만, 둘랑 워셔(주석채굴 여성 노동자)·아마(가사 노동자)·삼수이(여성 건축노동자)·호커(길거리음식 등 난전 판매상) 등 다양한 여성 직업군이 속속 등장했다. 테스토스테론이 넘쳐나던 곳에 에스트로겐이 더해지자 페낭은 ‘머무는 자’의 공간에서 ‘터잡고 살아가는 자’의 도시로 점차 바뀌었다.
아편의 시대-주석의 시대-고무의 시대를 거치며 150년간 화인들의 정치적 정체성도 분화·변천을 겪었다. 영국 국적에 영어교육을 받은 서구화된 ‘해협화인’, 중국이란 뿌리에 무게중심을 둔 ‘해협화교’ 그리고 ‘지금, 이곳’ 페낭의 변화와 개혁을 중시하는 ‘페낭 디아스포라’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중국계 동남아인들은 앞서 사례로 든 ‘코라이환·키닌·커심비·참윗호·우롄테’들의 후예들이며, 이 세가지 정체성 어딘가에 가까이 있을 것이다. 화인들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이해한다면, 이들과 함께 좀더 조화로운 아시아의 미래를 직조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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