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7일 홍콩 출신의 프로게이머 Blitzchung가 방독면을 쓴 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인터뷰 말미에 그는 `광복홍콩! 시대혁명!`을 외치고 이례적인 중징계를 받게 된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쉽게 읽는 서브컬처-77]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는 중국몽(中國夢)을 꾸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이제 막 악몽으로 변할 참이다.
☞ 프로게이머, 광복홍콩을 외치다
시작은 지난 7일 하스스톤 그랜드마스터즈 경기였다. 홍콩의 프로게이머 Blitzchung(쩡응와이·32)은 경기 종료 후 진행한 인터뷰에서 방독면과 마스크를 쓰고 홍콩 민주화 운동의 주요 구호인 "광복홍콩! 시대혁명!"을 외치며 인터뷰를 마쳤다. 홍콩 출신 프로게이머의 이유 있는 외침은 이해하기 어려운 징계로 돌아왔다. 하스스톤 개발사인 블리자드가 해당 선수에게 그랜드마스터 자격 박탈과 상금 몰수, 1년간 출장 정지라는 이례적인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블리자드 측은 해당 영상을 삭제했고, 인터뷰를 진행한 캐스터 2명마저 해고했다.
블리자드는 이번 징계에 대해 '공공을 불쾌하게 하는 행위 또는 블리자드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모든 행위에 대해 블리자드 단독 재량으로 그랜드마스터즈 배제는 물론 해당 선수의 총상금을 0달러로 만들 수 있다'는 규정을 근거로 내세웠다.
물론 스포츠에서 정치적 중립은 중요한 이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경기장 내 정치·종교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2012 런던올림픽 당시 '독도는 우리 땅'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경기장을 뛰어다녔다가 A매치 2경기 출장정지와 벌금으로 약 410만원을 부과받은 이유다. 하지만 블리자드가 누군가. 2018년 말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방식으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의 공식 프로 리그'인 히어로즈 글로벌 챔피언십(HGC) 폐지를 통보하며 '정식 스포츠 종목으로서의 e스포츠' 앞날에 재를 뿌린 그들 아닌가.
게다가 홍콩 민주화 운동을 정치적 중립성이란 대의명분도 아닌 '공공을 불쾌하게 하는 행위'로 규정하며, 과도한 징계를 내린 블리자드의 독단에 게임 업계는 물론 국내외 여론은 분노했다. 특히 이번 사건을 통해 평소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을 강조하며 자사 게임에 해당 요소를 '무리하게' 녹여왔던 블리자드가 자신들의 행보를 완전히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준 탓에 비판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누구보다 PC를 부르짖으면서도 차이나머니를 위해서는 PC를 앞장서서 억압하는 위선자라는 것.
블리자드가 개발한 게임 하스스톤의 공식 웨이보 계정에 올라온 사과문.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사과문에 하스스톤 홍콩 민주화 운동 중징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하스스톤 대학 챔피언십에 출전한 대학생팀 `아메리칸 유니버시티` 하스스톤 팀원들이 `프리 홍콩`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블리자드 측은 지난 16일(현지시간)에서야 이들에게 6개월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잇따른 사건은 불붙은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블리자드는 하스스톤 중징계 사건 이후 자사 공식 웨이보 계정을 통해 중국에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해당 사과문은 "우리는 항상 우리나라(국가)의 존엄성을 수호할 것입니다"로 마무리된다). 북미 블리자드 포럼에서 홍콩을 언급한 사용자에겐 1000년 밴(출입 차단)이라는 징계를 내렸고, 하스스톤 대학 챔피언십에 출전한 대학생 3명이 생중계 중 '프리 홍콩 블리자드 보이콧(Free Hongkong, Boycott BLIZZ)'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보이자 방송을 중단시켰다.
네티즌들이 그린 메이 팬 아트. 게임 오버워치에 등장하는 중국 캐릭터를 홍콩 시위의 아이콘으로 재해석했다. 또 블리자드의 빅히트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게임 소스를 활용해 천안문 항쟁의 `탱크맨`를 재현한 게이머도 등장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정치권도 말을 보탰다. 론 와이든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은 SNS 계정을 통해 "블리자드는 중국 공산당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굴욕을 감내했다"며 "그 어떤 미국 회사도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자유를 향한 호소를 검열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마르코 루비오 공화당 상원의원도 "중국은 자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르웨이의 한 국회의원은 액티비전 블리자드 대표 앞으로 징계 조치에 항의하는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 차이나머니, 엔터테인먼트를 공습하다
반발이 거세지자 블리자드는 꼬리를 내렸다. 지난 12일 제이 알렌 브랙 블리자드 CEO는 홈페이지를 통해 Blitzchung과 캐스터 두 명의 징계 기간을 6개월로 줄이고, 상금 몰수도 철회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를 향한 비난은 사그라들지 않고, 불매운동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블리자드의 '말뿐인 PC주의'에 대한 반발도 있지만 근본적인 동력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깊숙이 침투한 차이나머니, 그중에서도 자본력을 무기 삼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중국 행태에 대한 반발이다.
NBA도 차이나머니의 격랑에 휘말렸다. 휴스턴 로키츠의 대릴 모리 단장이 지난 4일 '자유를 위한 싸움, 홍콩을 지지한다'는 글을 자신의 SNS 계정에 올렸다가 중국 정부와 기업, 스포츠계가 모두 들고 일어나 보이콧하자 단장은 물론 NBA 사무국도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내에서는 'NBA가 홍콩의 인권 대신 중국의 돈을 택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 `Band in China` 에피소드의 한 장면. 유명 캐릭터들이 등장해 곰돌이 푸를 (시진핑 주석을 닮았다는 이유로) 핍박한다. |
날카로운 풍자로 유명한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도 중국과 갈등을 빚었다. 시즌 23의 2화 '밴드 인 차이나(Band in China)' 편에서 중국에서 벌어지는 표현의 자유 탄압과 인권 박해, 미국 영화계의 중국 눈치 보기 등을 직설적으로 묘사했다. 에피소드 제목도 'Banned in China'(중국에서 금지된)와 동일한 발음의 단어를 차용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인 10월 1일 공개된 해당 에피소드 때문에 사우스파크는 중국에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검색 엔진과 포털 사이트에서 모든 사우스파크 자료들이 지워졌고,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언급이 제한됐다. 이에 사우스 파크 제작진은 공식 SNS 계정을 통해 사과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이 압권이다. "우리도 민주주의와 자유보다는 돈을 더 사랑한다" "시 주석은 곰돌이 푸와 전혀 닮지 않았다" 등 사과문을 빙자한 또 다른 조롱이었다. 사우스 파크다운 답변인 셈이다.
☞ 중국의 인권 탄압에 동조한 기업들 'Band in China'
해당 블랙리스트에는 블리자드와 NBA를 비롯해 애플과 티파니, 마블 스튜디오, 월트 디즈니 컴퍼니, 메르세데스 벤츠, 나이키 등 글로벌 대기업이 줄줄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애플은 홍콩 시위대가 경찰 위치를 파악해 추격을 피하는 지도 애플리케이션 홍콩맵닷라이브(HKmap.live)를 자사 앱스토어에서 삭제했는데, 이는 중국 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비판 논평이 나온 지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달라이 라마의 어록을 활용한 인스타그램 글을 올렸다가 중국에 사과하고 해당 글을 지웠다. 티파니는 한쪽 눈을 가린 모델 사진을 놓고 홍콩 민주화 시위 도중 실명한 여성을 연상시킨다는 중국 항의에 해당 사진을 삭제했다. 해당 리스트 중에는 한국 기업도 포함돼 있는데 바로 JYP엔터테인먼트다. 2015년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가 대만(중화민국) 국기를 들고 인터넷 방송에 출연했다가 '대만 독립주의자' 논란이 커지자 쯔위 본인이 "중국은 하나뿐"이라며 사과한 일 때문에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중국의 시사만화가 왕리밍의 만평. 차이나머니를 앞세워 디즈니와 블리자드, NBA 등을 굴복시키는 중국 당국을 풍자했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왕리밍은 2017년 영국 언론탄압 감시단체 `인덱스 온 센서십(Index on Censorship)`이 주는 국제언론자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14억 강국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
14억 인구의 중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다. 영화·게임 등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중국 내 스크린 수는 2018년 말 기준으로 6만1287개에 달해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 성적표는 중국 개봉 여부에 달려 있을 정도다. 영화시장 규모도 곧 할리우드를 추월할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시장조사 업체 뉴주에 따르면 2018년 중국 게임산업 매출은 44조9000억원, 게임 인구는 6억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시장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개발사인 라이엇 게임즈 역시 2015년 텐센트가 완전히 인수한 중국 게임사다(라이엇 게임즈는 공식 채널을 통해 최근 '홍콩 사태를 포함한 정치나 종교 등에 대한 개인 사견을 공식 방송과 구분할 것'을 당부했다).
[홍성윤 편집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