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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장르융합 분야 열정 청년들 전폭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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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제도 사각지대의 젊은 문화예술인 키우는 수림문화재단의 유진룡 이사장

재일동포 김희수씨 1천억 출연 뜻 이어

‘3년 단임 무보수 비상근’ 이사장 맡아

“선량한 관리자로 임기 중 시스템 마련

공정하게 뽑아 재정·공간 과감히 지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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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가 우리 사회에 준 큰 선물이기에 책임감이 무겁습니다.”

지난 11일 오후 수림문화재단 1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수림아트센터 2층 재단 사무국에서 만난 유진룡(63) 이사장의 말이다. 동대문구 홍릉에 있는 수림문화재단은 재일동포 사업가이자 중앙대 이사장이었던 고 김희수 선생이 2009년 전 재산 1천억원을 내 만들었다. 민간 문화재단 출연금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유 이사장은 지난해 6월 4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사실 그는 ‘소신과 영혼을 가진 공직자’로 국민에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등과 관련한 업무 갈등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서 면직됐고, 이후 용기 있게 국정농단 실태 폭로에 나섰다. 이사장직 제안을 받았을 때, 아직도 곳곳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어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며 처음엔 고사했다. 하지만 재단의 간곡한 부탁과 한국 사회에 준 큰 선물을 잘 지켜가야겠다는 생각에 이사장직을 맡았다. 3년 단임으로 정관을 바꾸고 무보수 비상근으로 일한다.

수림문화재단은 남보다 뛰어나지 않더라도 창의력과 열정이 있는 젊은 문화예술인을 지원한다. 유 이사장은 “기존 지원 심사 기준에서 빛을 보기 어려운 생각이나 사람을 키우기 위한 사업에 주목한다”고 한다. 수림문학상의 경우 등단 10년 이내의 작가들이 참가하고, ‘수림뉴웨이브’ 행사와 상은 장르 융합(국악과 양악, 국악과 미술 등)과 새롭게 생겨나는 분야가 대상이다. 이 밖에 수림문화예술 서포터즈, 수림인문아카데미, 수림미술상 등이 있고, 예술경영 우수 사례 상금 지원 등도 한다.

유 이사장은 “전체 지원시스템을 정비해 과감하게 지원하려 한다”고 한다. 그는 임기 시작 뒤 지난 15개월간 수림문화재단 운영 틀을 정비해왔다. 우선 오랫동안 끌어왔던 재단 내부 문제가 정리되면서 내년부터는 지원규모를 10억원에서 20억원으로 두 배 늘릴 수 있게 된다. 지원 대상자를 양적으로 늘리기보다는 수가 적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되게 지원하려 한다. 지원금을 연초부터 지급하고 정산을 간소화하는 등 운영을 효율적으로 하고 공연장, 전시장, 연습장과 같은 공간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새로운 실험도 하고 있다. 수림문화재단은 과학기술연구기관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키스트, 카이스트 틈에 낀 지리적 특성을 살려 올해 과학과 예술의 결합을 시도한다. 키스트의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이어주는 작업을 지원하고 있는데, 11월 말쯤 작품이 나오고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민간재단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이사들과 직원들이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유 이사장은 전한다.

그는 직원들에게 ‘친절과 공정’을 강조한다. “(지원을 받는 사람들에겐) 돈 쥐고 있는 사람들은 갑으로 느껴지기 마련이기에 친절하고 공정하게 일할 것을 부탁한다.” 재단이 넓혀가야 할 방향도 모색하고 있다. 공공미술 등 문화예술 지원으로 수림문화재단 주변 지역을 발전시키고 지역 공동체를 살리는 데 기여하는 것, 갈등이 깊어지고 소통 없이 각자 살길을 찾는 사회를 문화예술적으로 치유하는 데 기여하는 것, 가곡 등 사라져가는 문화예술 작품들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등이다. “전 하는 게 없고 바람잡이다”(웃음)라며 “내 것이 아니고 우리 것이니 적극적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내달라고 직원들에게 늘 부탁한다.”

유 이사장은 2014년 공직사회를 떠난 뒤 국민대 대학원에서 리더십과 행정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동안 살면서 얻은 경험이나 지식, 인적 네트워크 등을 다른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데 보태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단다. 이미 충분히 사회에서 혜택을 받았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반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시민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생기면 그는 주로 전환기 사회에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꿔가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예컨대 일만 하며 살 수 있는 시대는 더는 오지 않기에, 일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 노는 것’도 미리 준비해야 한단다. 자신은 걷기, 책 읽기, 여행하기 등으로 남는 시간을 즐긴다고 한다. 또한 “자기와 다른 남을 받아들이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화하지 않는 사회는 위험하며 정직, 배려, 사랑 등 지향해야 할 가치를 찾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 이사장에게 가장 멋있게 ‘잘 노는 것’은 무엇일까?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3년 임기 동안 시스템 만드는 역할에 집중하고, 이사들과 직원들이 재단의 장기적인 운영 방향을 꾸준히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의욕 넘치는 그의 활동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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