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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함인희의세상보기] 대학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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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강 계획’ 제출 새 규정 도입에 / 법정 공휴일에도 수업 진풍경 / 현장에선 학생도 교수도 곤혹 / 교육부 ‘불통 지침’에 무력감만

예전엔 10월 1일 국군의 날을 필두로 3일 개천절, 9일 한글날을 지나 심지어 24일 유엔의 날도 공휴일인 시절이 있었다. 여기에다 추석이 있고 중간시험 기간까지 겹치면 대학가의 10월 한 달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이제 법정 공휴일은 개천절과 한글날로 축소됐고, 대신 추석명절에 연휴 제도가 도입된 지도 여러 해가 흘렀다.

한데 요즘 대학가에서는 법정 공휴일에 그대로 수업을 감행하는 진풍경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다. 학기 초에 15주 기준 한 학기 강의계획서를 제출할 때 법정 공휴일을 포함해서 보강계획서를 제출하도록 새로운 규정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물론 교수 개인이 국내외 학회에 참석한다거나 예기치 못했던 긴급상황이 발생함으로써 부득이 수업을 휴강하게 될 경우 보강(補講)을 하는 것은 한 학기 강의를 책임지는 교수의 의무라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세계일보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하지만 법정 공휴일로 인한 휴강까지 보강계획을 세워 실행해야 한다는 지침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학의 법정 수업일수 15주 의무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교육부 지침이기에 이를 필히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대학의 전달사항이지만 말이다.

덕분에 현장에서는 다소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 같다. 일단은 보강을 위해 시간을 조정하고 강의 장소를 다시 물색하는 것이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다. 다른 수업시간과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강의실도 여유가 있는 보강 시간을 잡다 보면 대체로 방과후로 결정되기 십상이다.

이 경우 학생 입장에선 ‘알바 시간’과 겹치기도 하고, 스펙을 쌓기 위해 수강 중인 각종 학원 시간표와 충돌하기도 하며, 예정된 약속이나 집안 대소사 참여 등 개인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기에, 모든 학생이 100% 동의하는 보강 시간을 잡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설혹 가까스로 보강 시간을 잡는다 해도 그 시간에 강의실 여유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물론 없다. 번거롭고 복잡한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학생들 정서까지 감안하게 되면 담당교수의 스트레스는 배가되기 마련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요즘 추세는 따로 보강 일정을 잡지 않고 법정 공휴일에도 예정대로 수업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다. 이 경우 대부분의 학교 시설이 문을 닫은 상태에서 출석해야 하는 학생의 소소한 불만은 차치하고라도 현실적인 문제가 또 발생한다. 학생 수가 많은 대형 강의의 경우 마이크도 필요하고 파워포인트(PPT)나 동영상 활용도 필수인 경우가 많은데, 하필이면 강의실 지원센터 직원이 모두 쉬는 날 마이크는 먹통이 되고 프로젝터는 켜지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시간강사 대우가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이런 형태의 난감한 상황은 시간강사들에게 더욱 곤혹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됨은 물론이다.

법정 공휴일에도 강의를 해야 하는 교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값비싼 등록금 대비 시간당 수업료가 얼마인지 계산하는 학생들의 영악함이 아니다. 하기야 모 교수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부득이 강의 당일 휴강 공지를 하게 되자, 일부 학생이 교수 휴대폰에 “수업시간에 택시 타고 갔습니다. 택시비 주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정도는 젊은 시절의 애교나 치기로 봐줄 만하지 않은가.

그보다는 대학의 소소한 행정까지 대학 자율에 맡기기를 꺼리는 듯한 교육부의 입장 및 소통 방식이 대학 구성원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는 생각이다. 한 학기 수업일수 15주를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사실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한 학기라도 대학에서 강의를 담당했던 경험이 있다면 매주 3시간씩 15주를 교육받았을 때 학생들이 부여받는 3학점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30대 때는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모른 채 닥치는 대로 가르치다가, 40대가 되면 자신이 아는 것만 가르치게 되고, 50대가 되면 학생들이 알아들을 만한 것만 가르친다’는 대학가 유머 속엔 풍자적 요소가 담겨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수는 강의계획안을 구상할 때부터 한 학기 동안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충분히 생각하고 어떤 방법으로 가르칠 것인지 충분히 고민한다.

법정 공휴일에도 쉬지 않고 보강을 해서까지 수업일수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을뿐더러 효율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교수 개개인의 보강 여부까지 위로부터 아래로 지침을 내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통용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연장선에서 저출산의 여파로 수험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는데 대학 정원 조정이 교육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대학입시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고 있음에도 신입생 선발방식의 자율성을 조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이 우리네 대학의 현주소가 아닐는지. 세계 유수 대학의 학생 1인당 투자비용이 한국 명문대학의 10배가 넘는다는데, 기여입학제 불허는 물론 등록금까지 동결된 상황에서 대학의 미래를 어찌 설계할 수 있을지 싶다.

선진국의 대학은 교육 중심에서 연구 중심을 거쳐 산학협력단계를 지나 이제는 미래사회를 선도할 생태계의 핵심으로 부상하기 위해 전력질주하고 있다는데, 우리의 대학은 지금 어디쯤 와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판단도 진단도 불가한 상황 앞에서 무력감이 깊어만 가는 요즘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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