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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시론] 장원급제 DNA와 장인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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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입식 교육 하는 韓日, 공부로 장원급제 꿈꾸는 문화

한 우물만 파는 장인 문화… 노벨 과학상 '24대0' 차이 만들어

조선일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일본에서 또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과학에서만 벌써 24번째다. 가장 많이 비판받는 것은 우리 교육이다. 그런데 일본도 우리처럼 수십 년간 주입식 교육을 하고 객관식 상대평가를 해왔던 나라인데 왜 우리와 다를까? 서울대 물리학과 김대식 교수는 저서 '공부논쟁'(창비, 2014)에서 그 이유를 우리 공부 문화의 장원급제 DNA와 일본 공부 문화의 장인 DNA로 설명하고 있다.

오랜 기간 우리 민족은 관리를 시험으로 선발했다. 전 국민은 아니어도, 신분이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상승될 수 있었던 여지가 동시대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있었다. 그러니 예부터 공부의 목적은 입신양명이었다. 장원급제가 모든 공부하는 이들의 꿈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국숫집 주인은 자식이 국숫집을 물려받기보다 어떻게든 열심히 공부해서 입신양명하길 원한다.

그런데 일본은 열심히 공부해서 입신양명하는 체제가 없었다. 공부를 하겠다면 그 공부에서 대가가 되길 바라지 그 공부를 발판으로 다른 뭔가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어려웠다. 수천 년간 왕조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신분제가 뒤집힌 적이 없으니, 사무라이 집은 대대로 사무라이가 되고, 우동집 아들은 더 나은 우동을 만드는 것이 영광스러운 삶이었다. 즉 우리는 돈가스 집 아들이 고시 패스해서 판검사 된 것이 영광인 문화이고, 일본은 3대가 돈가스를 만드는 것이 영광인 문화다.

이러한 공부 문화의 차이는 교수들의 행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교수들은 테뉴어(정년 보장)를 받고 나면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학자의 길을 택할지, 보직이나 정관계에 발을 들여서 행정 혹은 폴리페서의 길을 택할지, 아니면 대중 강연이나 언론 기고 등을 통해 대중 지식인의 길을 택할지 고민한다. 교수직을 끝까지 연구자로만 생각하기보다 교수직을 발판으로 다른 무엇을 하려 한다. 보직이나 폴리페서로 발을 들이면 연구가 중단되기 때문에 다시 학자의 길로 가기 어렵다. 게다가 장관이나 총리로 입각하면 주변 동료 교수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이런 문화는 열심히 공부해 교수 된 것이 입신양명의 수단이 되는 우리의 장원급제 DNA가 반영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총리나 장관을 대부분 정치인 가문에서 대를 이어 하기 때문에 한번 교수면 끝까지 교수이지 중간에 정치나 다른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다른 길로 '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도 않는다. 그래서 회사에 들어가서도 은퇴까지 한 연구에만 매진하고, 교수가 되어서도 한 연구에만 매진한다. 이러한 장인 DNA가 오늘날 일본에 수십 개의 노벨상을 안겨준 원동력이 되었다.

10여 년 전 일본 홋카이도대학교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 동료 교수들과의 대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서울대 총장이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이를 전하자, 일본인 교수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너무나 놀라워했다. 그런데 쉽지 않은 영전이라고 놀라는 줄 알았더니 일본 교수들은 그 교수가 총리가 되는 일을 진짜 기꺼워했느냐고 반문했다. 그들은 교수가 총리가 되는 것을 영전으로 보는 것 자체가 정말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김대식 교수는 우리 엘리트의 한계를 냉철하게 지적한다. "시험 잘 보는 학생은 남들이 주는 문제를 푸는 데까지는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새로운 발견 혹은 발명을 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이라도 거대한 전환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계속 망하는 거예요."

한 연구가 노벨상 수준에 이르기까지 대학 이후 평균 30년 이상 걸린다. 그러니 폴리페서가 영전인 문화에서는 대학 이전 12년 공교육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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