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6 (일)

[박경서의 퍼스펙티브] 진실은 진실, 거짓은 거짓일뿐…진리가 바뀌진 않는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국 사태가 진리 개념 흔들어놔

참·거짓 모호한 가짜세계 빠진듯

광장 함성, 배신감·좌절에의 분노

소통·담론 단절시 전체주의 초래



광장에서 만난 희망과 두려움



중앙일보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가 시위 인파로 가득 찼던 지난 3일 박경서 문학평론가가 대구에서 상경해 군중 속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서 있다. 현장에서 시민들을 직접 만나 본 그는 두 진영으로 갈린 ‘광장정치’에서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고 했다. 장세정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가 그친 개천절 오후 1시 무렵. 필자는 서울시청 옆 덕수궁에서부터 광화문광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인파에 부딪혀 한 발자국 떼기도 힘들었다. 군중의 함성과 박수 소리,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래와 연설이 뒤범벅돼 뭐가 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리저리 휩쓸리다 그만 방향감각을 잃고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서 있는 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었다.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월든』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 시작한다”고 썼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때문인지 소로의 말처럼 방향감각을 잃고 정신을 차린 후에야 조국 퇴진,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알았다.

지방에 사는 필자가 서울 집회 현장을 찾아간 이유는 ‘조국 가족’의 각종 비리 의혹을 검찰이 신속하고도 공정하게 수사하고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왜 이렇게 광장으로 뛰쳐나오게 됐는지 그 이유를 직접 듣고 싶어서였다.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신문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전히 집회 소리가 컸지만, 현장에 나온 시민과의 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했다.

말을 걸어봤다. 30대 청년 셋은 태어나 처음 집회에 참여했는데, 참과 거짓이 명백히 드러났으니 이제는 조국 법무부 장관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생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나온 주부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내뱉는 조국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 화를 발산하기 위해 나왔다면서 엄마들의 분노를 꼭 좀 전해달라고 했다. 60대 남성은 비리 의혹이 터졌을 때 현 정부의 공정성과 도덕성을 믿고 기대했는데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더 평등한 대한민국

중앙일보

박경서 문학평론가가 지난 3일 서울 덕수궁 앞에서 "조국 퇴진" 집회를 참관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대화를 해 본 이들의 분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정치이념에 매몰돼 있지도 않았고, 어느 정당을 대놓고 지지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나온 이유는 단순했다. 상식과 이성적 판단에 따른 배신감과 좌절감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기회는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공정하고 결과는 불의해졌다”는 불만과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의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이 공표한 ‘7계명’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즉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던 계명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로 변질한 것과 다르지 않다. 평등이 불평등으로 변질돼도 그것을 평등이라 둘러대고, 공정이 불공정으로 변해도 그것을 공정이라고 현혹하고, 정의가 불의가 됐는데도 정의라고 외쳐대고 있다. 그렇다 보니 국민은 가치관의 혼란에 직면해 아포리아(Aporia·교착 상태)에 빠져 버린 것 같고, 한국 사회는 참과 거짓의 구분이 모호한 시뮬라크르(Simulacra·복제된 가짜)의 세계에 침잠되는 듯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재현인 미메시스(Mimesis·모방)에는 에이콘(Eikôn·원본의 복제)과 판타스마(Phantasma·복제의 복제)가 있다. 에이콘은 원본에 충실한 참된 모방이며, 판타스마(시뮬라크르)는 모방의 모방(복제의 복제)으로 일종의 거짓이다. 여기서 원본은 영구불변의 진리이자 현실의 모범을 뜻하는 이데아(Idea)를 가리킨다.

그런데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 도전해 현대사회를 이데아와 시뮬라크르, 다시 말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없는 시대, 나아가 ‘객관적 진리에 대한 부정’의 시대라고까지 말한다.

이제 한국 사회는 들뢰즈의 말대로 진리에 대한 개념이 와해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있다. 정경심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 들러 PC를 반출한 사실을 두고 대표적 진보 논객은 ‘증거 인멸’이 아니고 검찰이 장난칠 것에 대비한 ‘증거 보전’이라고 둘러댔다. 소피스트의 궤변이다. 그의 레토릭은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없는 시뮬라크르 세계의 전형이다. 이렇게 가다간 여태껏 살아온 조국의 삶도 조국 자신의 삶이 아니고 조국을 복제한 가짜들인 시뮬라크르들의 삶이라고 우겨대진 않을까.

들뢰즈가 현대를 시뮬라크르의 세계라고 말했지만,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이데아는 바뀌지 않는다. 평등은 평등해야 하고, 공정은 공정해야 하고, 정의는 정의다워야 한다. 정의가 불의가 되는 이 기막힌 모순을 광장에 나온 이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친다. 트라시마코스는 법과 힘을 동일시하고, 둘 다 강자의 권리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소피스트 철학자였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가 “불의한 자의 삶이 올바른 사람의 삶보다 더 낫다”고 주장했는데,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이 말이 혹여 진리가 될까 봐 몹시 두려워하는 듯했다.

귀가하는 열차 좌석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혼란한 마음을 추슬러 보았다. 오늘 나는 광화문 광장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모순된 두 개의 어휘가 오버랩됐다. ‘희망’과 ‘두려움’이었다.

『동물농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혁명의 실패는 돼지들의 권력욕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동물들의 무지함과 권력에 대한 냉소적 태도 역시 권력의 부패를 방조한 셈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정치적 의식이나 통찰력이 없어 7계명이 바뀌어도 그 사실을 모르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밀실은 부패했고 광장은 공허하다

중앙일보

박경서 문학평론가가 지난 3일 광화문에서 "조국 퇴진" 집회를 취재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목도한 광장의 모습은 『동물농장』의 전복이었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시민들은 『동물농장』 속 무기력한 그 동물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2400여 년 전 플라톤이 설파한 ‘정의’를 재현하기 위해 부르짖고 있었다. 정의가 살아있음을 외치는 와중에 꿈틀거리는 ‘희망’을 보았다.

다른 한편에선 최인훈(1936~2018)의 소설 『광장』 속 주인공 이명준이 떠올랐다. 그는 남한과 북한 모두에 ‘진실한 광장’이 없음을 깨닫고 중립국 인도로 가던 중 검푸른 바다 물결 위로 몸을 던진다. 1961년 판 『광장』 서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인간을 이 두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광장은 사회적 삶의 열린 공간으로 인간 활동의 무대이고, 반대로 밀실은 타인으로부터 격리된 개인의 내밀한 삶의 공간이다. 『광장』 서문처럼 광장과 밀실은 씨줄과 날줄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광장에서 자유로운 소통과 담론이 단절되면 전체주의 사회가 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 광장의 현실은 정치적 구호가 난무하는 ‘광장 정치’의 공간이 된 듯하다. 축제의 노래 대신 이념 투쟁으로 얼룩진 광장은 이명준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광장의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 광장정치의 ‘두려움’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광장은 두 개로 갈라져 있다. ‘조국 퇴진’이 민심이라고 외치는 보수적 광장이 하나다. ‘검찰 개혁’이라는 슬로건을 급조한 진보적 광장이 다른 하나다. 진보 진영 기관차에 조국 대신 대통령이 올라탄 형국이다.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선 채 이념의 칼날을 서로에게 들이대며 치킨 게임을 하듯 돌진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 파국을 벗어날 수 없고 자칫 ‘정치적 내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모습이다.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각각 검찰청 앞과 광화문 광장에서 경쟁하듯 세를 과시했으니 이제 서로에게 겨눈 칼날을 거둬들일 때다. 칼에 찔리는 피해자는 결국 다수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돌진하는 기관차의 브레이크를 밟고 정치적 내전을 종식해 국민을 통합할 책임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했다. “통치는 피치자에게 유익한 것을 제공하고 명령하며, 약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지 강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목(牧)이 민(民)을 위해 있는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났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목이 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플라톤과 다산의 엄중한 가르침을 지금 대한민국 정치인들에게 새삼 상기시켜주고 싶다.

■ ◆박경서

문학평론가 겸 번역가. 조지 오웰 문학을 전공해 영남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와 안동대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1984년』,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영국식 살인의 쇠퇴』 등을 번역하고, 문학해설서 『조지 오웰』을 출간했다.

중앙일보

박경서 문학평론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