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심축으로 한·일 두바퀴 샌프란시스코 체제 동요
미·일 인도태평양전략 한국을 하위 파트너로 재편 노려
한국, 북과 정세 공유하고 전략목표 따라 동맹 유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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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로 촉발된 한-일 갈등의 뿌리에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일본 아베 정부의 ‘정상국가화’ 전략의 충돌이 있다.
아베 정부는 2015년 안보법제를 통과시켜 글로벌 차원에서 미-일 동맹을 강화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적극 관여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했고, ‘군대를 보유한 정상국가’를 향한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한-미 관계를 중심으로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동북아의 안보 지형을 변화시키겠다는 구상이고, 일본의 역할은 뚜렷하지 않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미국과 협력해 북한 비핵화와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미-중의 본격적 패권 전쟁에 앞서 주변 열강들에 흔들리지 않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전략은 옳은 방향”이라면서도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전략과 충돌이 일어난 것이 지금의 한-일 위기로 나타났고 동북아 질서 전반에도 변동이 일어나고 있어, 한국 정부도 전략의 점검과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일 갈등의 더 큰 배경에는 전세계적으로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각국이 ‘각자도생’으로 대응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는 대전환의 시대가 있다. 한국이 ‘거대한 체스판’의 변화를 민감하게 읽고 전략적 목표에 따라 일관된 외교를 펼쳐야만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도 진전될 수 있다. 원칙을 지키며 한-일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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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65년 체제 현재 한-일 관계의 기본 틀인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합의하지 못했다. 일본은 식민지배가 합법적이었다는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은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임을 명시하고, 이를 근거로 일본 기업들이 식민지 시대에 불법적으로 강제동원한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일본에 유리하게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 체제가 50여년 만에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일본 아베 정부는 한국을 ‘안보상 믿을 수 없는 국가’로 몰아붙이고 한국 산업의 급소를 겨냥한 경제 보복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로 남북관계, 북-미 관계가 진전되고, 동북아 안보질서에서 미국에 이은 2인자 자리를 지켜온 일본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차단하려는 전략적 고려도 작용했다. 한국이 65년 체제의 틀에서 벗어나 식민지배 문제와 동아시아 전략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을 차단하려는 압박 전략이다.
일본의 요구에 굴복해 서둘러 봉합하기보다는 현재 갈등의 뿌리를 명확히 분석하고 원칙과 장기적 전략에 따라 한-일 관계의 새로운 틀을 마련해가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 판결대로 일본 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도록 원칙을 지키면서 긴 호흡으로 일본에 불법적인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는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서 한-일의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남기정 서울대 교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적극 추진하면서 여기에서 일본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인도·태평양 전략의 ‘함정’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전략 속에서 한국의 ‘위상’ 변화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연합국과 일본이 2차 대전을 종결하기 위해 1951년 맺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기반으로 미국이 설계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이 중심축이 되고 한국·일본 등이 바큇살로서 미국과 동등한 관계를 맺는 구조였다. 하지만 21세기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는 미·일·인도·오스트레일리아가 핵심 4개국이고, 한국·대만·아세안 국가들은 주변부 하위 파트너로 재편되는 구도가 진행되고 있다.
조성렬 연구위원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재강화하려 하고, 일본은 수평적이었던 한국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바꾸려 한다”며 “한국이 이 전략에 군사적으로 동참하면 한-일 관계가 수직적으로 재편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한국은 신남방정책과 인도·태평양 전략의 접점이 있는 부분에서만 사안별로 공조하는 ‘조화로운 추진’이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태 통일연구원 연구위원도 “일본의 구상에서 한국은 상당히 후순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국을 봉쇄하는 부분에 대해선 신중하게 접근하고 환경, 사이버 등 비전통 안보 분야에 선별적으로 참여하는 전략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 남북관계, 일관된 원칙 필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선 남북관계의 진전이 핵심 요소다. 지난해부터 올해 2월 말까지 3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등으로 순항하던 남북관계와 비핵화 협상이 난항에 처한 것은 현재 한국 외교의 난제다. 북-미 간에 비핵화 로드맵과 제재 완화·해제 문제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크고, 북한은 한국에 대해 한-미 군사연습과 F-35 등 첨단 무기 도입을 비난하며 거세게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조성렬 연구위원은 “북한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데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관계를 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며 “지금까지는 남북 간에 비핵화와 평화체제에 국한해 논의를 해왔지만 국제질서의 판이 바뀌는 상황에서는 남북 최고위층에서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우리 민족의 장래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 동맹을 다시 묻다 근본적으로는 ‘흔들리는 국제질서에서 한국이 어떻게 중심을 잡고 대응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2차대전 직후 형성돼 70년 이상 된 낡은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한-일 관계 갈등은 한-일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더는 이전처럼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보아야 한다.
이수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동맹에만 의존하는 기존 외교안보에서 벗어나, 한반도 운명은 한국이 책임진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며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잘 유지해야 하지만 동맹이라는 이유로 항상 같은 길로 가는 게 아니라 한반도 평화·번영이란 한국의 전략 목표에 도움이 되느냐를 중심에 놓고 때로는 같이 때로는 따로 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기반으로 한 51년 체제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로부터 파생된 한반도 종전체제, 한일관계의 65년 체제도 제대로 바꿀 수가 없다“고 짚었다.
장기전으로 향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에서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지향하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과 장기적 통일이란 목표를 중심에 두고, 남북·한-미·한-중·한-일 관계 등의 말들을 체스판 위에서 신중하게 움직여가는 새 시대의 외교안보 장기 전략을 구상할 때다. 박민희 노지원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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