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을 작가 조지 R R 마틴을 국내 언론 최초로 경향신문이 인터뷰했다. 세계SF대회가 열리는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마틴이 <왕좌의 게임> 한국어판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이영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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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폭염으로 녹아내릴 것 같은 날씨였지만, 8월의 더블린은 달랐다. 서늘하다 못해 싸늘했다. 경량 패딩까지 챙겨입은 더블린 사람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는 곳에서, 추위에 닭살이 오소소 돋는 곳으로의 이동. “겨울이 오고 있다”는 <왕좌의 게임>의 유명한 대사가 절로 떠오른다. <왕좌의 게임>의 작가 조지 R R 마틴(71)을 만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동시대 작가 중 조지 R R 마틴만큼 뜨거운 작가가 또 있을까. 그를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린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전 세계 49개국에서 출간, 9000만부가 넘게 판매됐다. 미국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제작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왕좌의 게임> 인기 덕에 그는 미국 포브스가 뽑은 ‘2014년 가장 돈을 많이 번 작가’ 15위에 오르기도 했다.
가상의 대륙에 자리한 칠왕국을 배경으로 한 <왕좌의 게임>은 잔인한 폭력과 선정적 장면, 주인공의 가차없는 죽음으로 유명하지만, 그것은 ‘양념’일 뿐 본질은 아니다. 권력다툼 속 인간들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냉혹한 현실인식에 기반한 서사, 매력있는 캐릭터들이 벌이는 다양한 갈등과 성장이 대중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시즌 8을 끝으로 논란 속에 막을 내렸지만, 소설은 현재도 23년째 집필 중이다. 1996년 출간된 1부 <왕좌의 게임>을 시작으로 5부 <용과의 춤>(2011)까지 출간됐으며, 현재 6부 <겨울의 바람(Wind of Winter)>이 쓰여지고 있다. 전 세계 팬들은 다음 권 출간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마틴이 해마다 빠짐없이 참석하는 행사가 있다. 전 세계 SF 작가와 팬들이 모이는 ‘세계 SF대회’(Worldcon)다. 마틴은 지난 30년 간 단 한 번의 월드콘에만 빠졌을 뿐이다. 8월 15~19일 열리는 ‘더블린2019 월드콘’에 참석차 아일랜드 더블린을 찾은 마틴을 13일(현지시간) 더블린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다. 마틴은 국내 언론사 가운데 최초로 경향신문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향신문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은 한국SF협회의 초청으로 월드콘을 취재했다.
경향신문과 인터뷰 중인 <왕좌의 게임>의 작가 조지 R R 마틴. 이영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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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팬으로 유명하다.
“나도 모른다.(웃음) 하지만 사람들이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캐릭터와 관계를 맺고, 서로 다른 캐릭터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대니(대너리스)를, 다른 이는 존 스노를 좋아한다고 편지를 써온다. 자기 아이들 이름을 세르세이나 타이윈으로 짓기도 한다. 티리온은 매우 인기있다. 각 독자에게 어떤 캐릭터가 사랑받을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난 정말 이 사람을 이해해’라고 독자는 느낀다. 캐릭터는 마음과 영혼의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판타지 소설이지만 현실적인 서사를 선보인다. 중세 역사에서 따온 역사적 개연성에 바탕을 둔 이야기와 환상적 요소가 섞여있는데.
“난 판타지 소설들을 평생 읽어왔다. 로버트 E 하워드의 ‘코난 시리즈’, 톨킨의 <반지의 제왕> 등. 하지만 역사소설과 대중역사(popular history)의 팬이기도 했다. 처음 <왕좌의 게임>을 썼을 때, 두 장르를 잘 섞고 싶었다. <반지의 제왕>은 20세기 위대한 판타지 소설이지만 톨킨은 마법을 무대에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배경에 머물게 했다. 주인공은 직면하는 문제를 마법이 아닌 현실적인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것이 <반지의 제왕>에 큰 힘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항상 유념하고 있다.”
-‘미국의 톨킨’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신이 기존 판타지 고전들로터 이어받은 것과 그것의 틀을 깨는 차별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톨킨에게 확실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1950년대 유명 역사소설 작가인 토마스 B. 코스테인, 영국 역사소설가 나이젤 트렌터 등의 영향도 받았다. 1970~80년대 처음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SF소설을 썼다. SF소설가로서 이성적 세계관을 갖게 됐고, 마법을 쓸 때에도 이성적으로 마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며 접근했다. 그 점이 바로 내 판타지 작품의 새로운 점일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복잡한 세계는 어떻게 설정하는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있다면.
“인물들에 집중한다. 인물들이 꼭 호감가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들의 성격이 드러날수록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나는 아주 엄격한 3인칭 화자를 쓴다. 매 장마다 다른 인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하게 한다. 그게 핵심이다. 인물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고, 갈등을 보게 함으로써 다양한 관점을 통해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가능하게 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혹은 자신과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캐릭터가 있다면.
“티리온이다. 사실은 샘웰 탈리 같다고 생각하지만, 티리온이 되고 싶다. 환경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지적능력과 위트로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티리온 라니스터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인물로 지적이고 냉소적이다. 샘웰 탈리는 밤의 경비대로 뚱뚱하고 겁이 많지만 똑똑하고 생각이 깊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중세 장미전쟁에서 소재를 따왔다. 중세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유는 뭔가.
“중세가 극단적인 부분이 많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중세 사회구조의 극단적인 면, 예를 들어 왕의 진주와 금은으로 수놓은 의상과 비참한 생활을 하는 서민들과 노예의 모습은 극단적 대조다. 기사도도 흥미롭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상주의자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사로서 범죄에 참여하고 내적갈등을 빚는다. 위대한 소설과 이야기들은 갈등에서 나온다. 내적·외적 갈등이 모두 있어야 한다.”
-당신은 SF, 판타지, 호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나이트 플라이어>는 SF 호러물로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제작하기도 했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혼합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나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인데, 어떤 작가들은 어려워 한다. 어떤 작가는 SF와 판타지가 정반대라고 생각하고 흑백으로 나눈다. 나는 다른 점이 있다면 ‘장식 요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SF엔 우주선과 외계인을 넣고 판타지에는 검을 넣는 식인데 이것들은 ‘장식’이다. SF든 판타지든 윌리엄 포크너의 말처럼 ‘인간 마음의 내적 갈등만이 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거나, 내적 갈등을 가지거나 하는 부분들이다.”
한국어판 <왕좌의 게임>을 들고 있는 조지 R R 마틴.이영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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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 극본을 쓰는 등 제작에도 다수 참여했다. 소설을 쓰는 것과 영상 제작에 참여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에선 같지만 형식은 매우 다르다. 그중 하나는 사람들과의 협업이다. 소설을 쓸 땐 컴퓨터와 작가만 작업을 할 뿐이다. 일종의 신이 되는데, 작중인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혼자 정해야 한다. 하지만 TV나 영화 작업을 할 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제작사의 지시를 받고 감독, 배우도 의견을 말한다.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TV·영화는 팀스포츠이고 책을 쓰는 것은 자신이 주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설은 나의 첫사랑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영화와 TV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다. 내 책들은 50여개국에 출간됐지만 드라마는 100여개국에서 방송됐다. 내 책을 읽지도 않았고, 읽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조차 드라마를 본다. 많은 시청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계속 읽게 만드는 이야기다. 아침 7시에 책을 들었는데 절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 시즌 1의 첫 에피소드를 봤는데 ‘한 편만 더’ 하고 계속 보게 되는 그런 이야기다.”
텁수룩한 턱수염과 넉넉한 인상이 트레이드 마크인 마틴은 사진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쁜 일정 가운데 어렵게 인터뷰가 성사됐지만, 모든 걸 물을 수는 없었다. 팬들에게 원성을 샀던 드라마 <왕좌의 게임> 결말 등 드라마에 대해선 질문을 받지 않았다(마틴은 자신의 블로그에 드라마와 소설이 다를 수도 있다는 글을 남겼다). ‘다음 책은 언제 나오냐’란 질문엔 “(<얼음과 불의 노래> 6부인) <겨울의 바람>을 지금 쓰고 있다”고만 밝혔다. 한국팬들에겐 “계속 읽어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팬들은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빨리 써주세요.”
■조지 R R 마틴(George R. R. Martin)=전 세계 SF·판타지 독자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는 작가. 1971년 <갤럭시>에 <영웅>을 발표하며 등단, 1975년 <리아를 위한 노래>로 휴고상을, 1980년 <샌드킹>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1980년대 인기 시리즈 <미녀와 야수>를 집필하는 등 방송작가로도 활약했다. 1996년 1부가 출간된 <얼음과 불과 노래> 시리즈로 대성공을 거두며 ‘미국의 톨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가상의 대륙 웨스테로스의 칠왕국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생존투쟁을 그린 작품으로 현실적 이야기로 전형적 영웅서사시 구조를 깨부셨단 평을 받았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은행나무에서 한차례 번역했다 오역 논란이 일자 새로 번역해 개정판을 출간, 현재 4부인 <까마귀의 향연>까지 출간됐으며, 최소 40만부 이상 국내에서 판매됐다.
드라마로 제작된 <왕좌의 게임> 포스터. |
더블린|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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