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재팬타운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이주한 일본인 주민 1000여 명이 거주 중이다. /동부이촌동=송주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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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근현대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 한 한일관계가 다시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 구도 속에서 재일한국인과 재한일본인은 가장 불안한 집단일 수 있다. 1945년 해방 당시 각각 200만명, 80만명에 달했던 양 인구는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외국인 인구 중 국적별 2위에 이를 정도로 많은 한국·조선인이 산다. 동시에 이들은 미래 한일관계의 가늠자이자 가장 합리적인 해법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에 이어 이번 두번째 순서에는 재한일본인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 사회 속 '가깝고도 먼' 일본인을 만나다…"아베 정부에 분노해달라"
[더팩트ㅣ동부이촌동=송주원 기자 장우성 기자] "이번에는 뭔가 달라요. 매출이 10분의 1은 줄었어. 아사히 생맥주가 주요 수입원이었는데…"
'재팬타운'에서 한 선술집을 운영하는 50대 한국인 남성 A씨의 말대로 한일관계는 ‘뭔가 다른’ 국면을 맞았다. 국내에 진출한 일본산 브랜드를 정리해 불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 앞에서 이용객의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불매 감시단’까지 등장했다. 불매 움직임은 지자체까지 번져 서울 강남구는 만국기가 설치된 테헤란로와 영동대로,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일대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모두 철거했다. 중구청은 명동 등 관내에 일본 제품 불매를 독려하는 깃발을 내걸려고도 했다.
◆'아사히' 안 팔리는 재팬타운 선술집
현재 1000여 명의 일본인이 거주 중인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재팬타운의 역사는 1956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 간 교류의 길이 트인 후 주재원들이 둥지를 튼 것이 시작이었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에도 테마거리로 분류해 재팬타운으로 표기된 이곳은 작은 상권이지만 일본식 음식점과 선술집이 즐비하다. 한 부동산은 일본어로 매물 정보를 제공했다.
한일관계는 시끄럽지만 9일 재팬타운은 평화로웠다.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주재원처럼 꼭 살아야할 사람만 오다보니 일본인 고객은 쭉 있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식 음식점을 운영하는 B씨 역시 "우리 가게는 재료 원산지가 모두 한국이라 그런지 매출에 큰 변화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저녁장사를 준비하던 중 잠시 담배를 피던 '이자카야 사장님' A씨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일관계가 좋은 걸 못 봤다. 그런데 이번은 뭔가 다르다”며 “사람들이 아사히를 안 먹는다. 매출이 10%는 줄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A씨의 술집은 재팬타운 맛집으로 손꼽히는 선술집이었다.
1000명이 모여 산다는 재팬타운에서 마주친 일본인 주민은 말을 아꼈다. 겨우 취재에 응한 익명의 40대 여성은 모든 질문에 “제가 무슨 말을 해서 잘못될까봐…”라고 답을 피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얼어붙은 분위기 탓인지 노출된 재팬타운에서 일본인 이야기를 듣기란 한일관계를 풀기 만큼 어려웠다. 밖으로 나가 한국 사회에 흩어진 재한 일본인을 찾아 나섰다.
◆"네 엄마 일본인이라며" 놀림받는 아이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남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여성을 '재한 일본인 처'라고 부른다. ‘부용회 부산본부’는 바로 이들의 부산 지역 조직이다. 1942년 일본 외무성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으로 구성된 부부가 일본에 1284쌍, 조선에 106쌍이 있었다. 해방 후인 1945년 말 한반도 내의 일본인 2만 7935명 중 1307명이 잔류를 희망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 중에는 재한 일본인 처가 대부분일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부산에 많았던 이들의 친목모임 '부용회'(芙蓉會)는 한일 근현대사를 관통한 시기를 온 몸으로 겪어낸 재한 일본인 처들의 발자취다.
한국남성과 결혼해 국내에 거주하는 일본여성은 지금도 꾸준한 편이다. 여성가족부 '국가별 국제결혼 건수'(2017)에 따르면 2016년부터 800건대로 소폭 하락하긴 했지만 2010~2018년 내내 약 800~1000쌍이 한국남성과 일본여성의 결혼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일본인 아내로 살아가는 이들은 한일 간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마음을 졸였다. 고향이지만 좀처럼 역사 문제에 틀어막은 귀를 열 생각 없는 일본 정부가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 엄마’를 둔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마다 놀림 받는 모습을 보면 한국도 야속했다.
일본은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로 위안부 모집 강제성과 식민지 지배의 도의적 책임까지는 인정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이 두 담화를 계승 발전하기보다는 부정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사진은 2015년 6월 9일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아베 총리를 비판하는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오른쪽)와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AP.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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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지금의 남편을 만난 준코(53·가명)는 강원도 한 소도시에 거주 중이다. 다문화센터에 나갈 때마다 만나는 결혼이주여성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자랑할 때마다 부러움을 감출 수 없다는 준코는 일본에 있는 부모님 생각에 차마 일본 국적을 버리지 못했다. 일본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다. 그러나 한국생활 23년째를 맞은 지금, 준코는 "어떨 때는 내가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도 가끔 까먹는다"고 말했다. 새색시였을 당시 "하필 데리고 와도 일본여자를 데리고 오냐"고 서운한 말을 했던 시댁도 이제는 "○○ 엄마"라고 살갑게 보듬는다.
준코는 결혼을 앞두고 조국과 남편의 나라에 얽힌 아픈 역사를 깊이 파고들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어릴 때도 어렴풋이 '일본이 잘못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는데 결혼 전에 공부해보니 정말 잘못했더라"며 "특히 위안부, 강제징용 부분을 공부할 때 같은 여자로서 몸서리를 쳤다"고 회상했다. 준코는 20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한일관계가 위기로 치달을 때마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일을 제대로 사과했다면…"이라는 생각이 굴뚝같다.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판결도 부정하는 일본을 보며 "이번에도 애매하게 피해 가려고 애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국에 섭섭한 점도 있었다. 바로 한일관계가 나빠질 때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온 아이들 때문이다. 준코는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 한일관계가 나쁠 때마다 '너네 엄마 일본사람이라며'라고 놀림을 받았다"며 "특히 큰애를 키울 때 저도 한국말이 서툴고 어린 엄마여서 많이 보듬어 주지 못했다"고 아픈 기억을 꺼냈다.
대도시는 아니지만 '보이콧 재팬'의 바람은 준코의 지역까지 불어 왔다. 외출할 때마다 '노 재팬'에서 알파벳 'O'만 일장기처럼 붉게 칠해진 큰 현수막을 마주한다. 동네 주민들과 수다를 떨 때마다 가기로 했던 일본 여행을 취소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내심 서운할 법도 하지만 준코는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놀림당할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웃어 보였다. 앞으로 바라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제 입장에서 무슨 할말이 있겠냐"라면서도 "엄마로서는 아이들이 미래 그 자체다. 일본과 한국 모두 후일을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 양국이 협력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본이 과거사 더 알아야 한국과 진정한 친구"
1919년 3.1운동 당시 일본이 당혹스러워 한 이유 중 하나는 무시했던 조선인들이 거국적인 저항 운동을 벌였다는 점이었다. 일본 역사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해방 후에도 한국인은 4.19혁명을 비롯해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2016년 촛불시위 등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웠다. 일본은 보수인 자민당이 1955년 창당 이래 5년간을 제외하면 계속 집권했다. 게다가 한국처럼 쿠데타가 아니라 모두 선거 결과였다.
지난 3월부터 한국에서 조사 연구 중인 리츠메이칸대 문화인류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 이마사토 하지메(30)는 이런 한국 사회를 높이 평가한다. 그에게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시대의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른 적응을 아주 잘 하는 민족, 나라"다. 20세기까지도 한국에 외국인 인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마사토는 "한국은 20년 사이 외국인이 늘어나자 단기간에 대책을 세워 다문화사회가 자리잡았다"며 "이제 일본보다 훨씬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됐다"고 했다. 또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줄 아는 나라이기도 하다. 민주화운동으로 군사정부에 승리했고 해방 후 74년간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이뤄냈다. 반면 일본 사회는 별 변화가 없었고 바꾸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한국사람이나 한국 사회에 큰 동경이 있다"고 말했다.
아베 정권의 주지지층은 혐한의 진원지인 '넷우익'이다. 2013년 12월 26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하게 위해 신관을 따라가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AP.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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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 혐한 시위를 보면서 한국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이마사토는 한일관계 악화 책임을 일본 쪽에 무게를 뒀다. 아베 정권의 주 지지층은 혐한의 진원지인 '넷우익'이다. 이를 잘 아는 아베 총리는 한국을 적대하는 정책을 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유권자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 사람들은 별 고민 없이 자민당에 투표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에도 책임은 있다. '일본에 대한 무관심'이다. 일제강점기 세대도 은퇴했고 일본에 정통한 사람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마사토는 "예전에는 한국은 일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 지금 한국은 일본 없이도 얼마든지 괜찮은 나라"라며 한국 내 일본의 존재감이 줄어든 게 무관심의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앞으로 관계 개선의 열쇠도 일본이 쥐고 있다고 봤다. 이마사토는 "한국은 이제 일본 사람과 일본 정부를 구별해서 볼 줄 안다"며 "정치와 문화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에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은 큰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K팝 붐으로 한국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는 늘었지만 역사나 정치 분야에서는 여전하다"며 "일본인들이 한국을 포함해 중국, 대만과의 과거사를 더욱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한국과 일본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직도 일본에는 한국을 열등한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않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마사토는 "혐한 시위가 벌어지는 이유는 한국이 일본보다 큰 나라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며 "한국인들이 일본 문화를 사랑하더라도 아베 정부에는 분노할 것을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 사법·입법·행정 3권은 기능부전 상태"
최초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시설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한 일본인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시모지마 요시스케(65)는 일본 시민단체인 '진상규명네트워크' 소속이다. 이 단체는 일제의 강제동원 역사를 조사하고 간행물을 발간하는 전국 조직이다. 그는 자신이 소장한 식민지 역사 관련 자료를 이 박물관에 기부하기도 했다.
시모지마의 고향인 기후현은 일제 강제동원 현장이 많은 곳이다. 특히 매년 8월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견학을 온다. 이들을 안내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다만 이번 여름은 한국에서 보낸다. 지난 3월부터 서강대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더 큰 목적은 자신이 유골로 발견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족을 찾기 위해서다. 그는 대규모 광산이 있던 기후현 가미오카에서 찾아낸 조선인 노동자의 유골들을 유족에게 인도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2007년에는 강제노역 도중 숨진 고 김문봉 씨의 유족을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시모지마는 일본과 한국정부가 강제동원 노동자 유골 인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일본정부는 말만 하고 실제 하는 것이 없다. 한국정부는 정치적 거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인도주의 문제인 만큼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숨진 조선인 유골 35위가 봉환된 2018년 8월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역 광장에서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봉환위원회 등 관계자들이 강제징용 노동자상에 묵념하고 있다./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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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부는 최근 한일관계 파국의 원인으로 대법원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을 지목한다. 오랜 세월 강제동원 노동자의 유골 송환을 위해 노력해온 시모지마는 아베 정부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핑계만 대는 일본 정부에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며 "(한국 대법원 판결이)국제법 위반이라는데 정말 그럴까? 한쪽에서는 일본기업에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라고 한다. 판결에 따르지말라는 아베 정부야 말로 법을 지키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임금 체불, 강제노동 피해 사실은 인정했지만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시모지마는 "피해는 인정하면서도 고식적 수단으로 피해자 승소 판결을 하지않은 사법부, 우리가 해결을 위한 법안을 제출했는데도 무시한 의회 등 일본의 사법·입법·행정 3권은 기능부전 상태"라고 비판했다.
그는 아베 정부와 우익은 한국을 계속 적대하고 그에 올라타려는 일본 언론 또한 힘이 막강해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 내 시각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다니는 캠퍼스에서 많은 숫자의 일본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한국 대학에 수많은 일본 젊은이가 다니는 걸 보면 아베 정부의 의도에도 우익과 언론만 들썩이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한국인에게도 "일본에 남아있는 강제동원 노동자 유골 문제에 좀더 관심을 가져달라. 유족은 한국에 있기 때문"이라고 당부한 그는 한일 시민의 연대 가능성을 묻자 이말을 남겼다.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들이 한국과 우호를 바란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저도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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