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5 (토)

[일사일언] 하루키의 만년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김희선 소설가


하루키는 어느 날 좁은 골목에서 '만년필 맞춤'이란 간판이 있는 조그만 가게를 발견한다. 그 가게의 주인은 깊은 숲 속의 커다란 새처럼 생긴 사람이고, 하루키가 만년필을 맞추러 가자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한다. 그는 손가락의 길이와 굵기를 재고, 피부의 기름기라든가 손톱의 딱딱한 정도를 측정한 후 공책에 적는다. 그리고 하루키의 척추뼈를 하나하나 다 만져보는데, 그 주인의 지론에 의하면 '인간은 척추뼈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자를 쓰는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이 만년필로 무엇을 쓸 것인지까지 묻는다. 만년필은 석 달 후 완성되어 집으로 왔다. 하루키의 말에 의하면 '꿈처럼 몸으로 쏙 스며드는' 만년필이었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얻은 만년필로 필기를 했다. 그것은 반짝이는 은색 몸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잉크는 검정이 아니라 짙은 군청색이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깃털 펜을 쓰고 싶었다. 몽테뉴처럼.(왠지 어려서부터 몽테뉴란 이름은 깃털 펜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버지의 서가에서 꺼내 읽었던 '수상록' 때문이겠지만.) 언젠가는 길에서 주워온 비둘기 깃털로 글씨를 써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글자는 마음먹은 대로 써지지 않았다. 만년필 대신 그냥 펜을 잉크에 찍어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잉크병을 쏟을 위험이 너무 컸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글자를 쓰지 않고 '친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꼭 맞는, 하루키의 말대로라면 '꿈처럼 몸에 쏙 스며드는' 만년필을 찾아 헤매고 있다. 어릴 땐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거대한 문구점에서, 나는 자주 만년필 코너 앞을 기웃거린다. 그렇게 구경을 하다가 온갖 펜과 연필, 공책 따위를 잔뜩 안고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만년필은 사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 어딘가에서 '내게 꼭 맞는 나만의 만년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엔 이런 비밀결사가 있을 수도 있다. 만년필의 비밀결사. 결사의 회원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만년필을 찾아 헤매지만, 실제로는 만년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점조직이라, 누가 그 결사의 회원인지도 영원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어제 탔던 버스 안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나와 같은 회원일지도. 이미 손에 꼭 맞는 최고의 만년필을 가진 하루키는, 아쉽지만, 회원이 될 수 없다.




[김희선 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