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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매경포럼] 우리 기업들 설 땅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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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최근 만난 10대 그룹 임원이 푸념을 했다. 해외 투자설명회를 잡으려 하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이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투자 수익률이 중요한데, 내수업종이다 보니 저성장에 빠진 한국에서 더 이상 초과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매년 해오던 투자설명회를 올해는 접어야 할 판이라고 씁쓸해 했다.

대기업 출신으로 20여 년 전 창업해 중견기업으로 키운 오너가 의외의 말을 했다. 올해 들어 비상경영 플랜을 시나리오별로 만들어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익도 잘 나오는데 뭔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번 정부에서는 성장을 도모하기보다 살아남는 게 목표라고 했다. 해외 사업 비중이 높아 다른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임에도 앞으로 몇 년간은 생존만 해도 성공이라고 했다. 표정엔 허탈함이 묻어났다.

대형 회계컨설팅사의 임원. 인수·합병(M&A) 중개업무를 하는데, 요즘처럼 기업에서 대접받으며 일했던 적이 없단다. 예전에는 중소·중견기업 매각 플랜을 짜서 가져가면 "어디서 장난질이냐"며 오너들에게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는데, 요즘은 "일단 들어와 앉아보시라"고 한다는 것이다.

기업 매각의 유혹은 창업 3세가 자라면서 급격히 커진다고 한다. 2세만 하더라도 부친이 회사를 일구며 고생하는 모습을 목격한 덕에 궂은일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3세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터프한 한국적 비즈니스 환경에서 굳이 회사를 물려주기도, 물려받기도 서로 부담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헐값 매각이 난무하고, 그중 일부는 중국 기업으로 넘어간다. 기술만 빨린 채 내동댕이쳐질 앞날을 직원들만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신세다.

중소·중견기업의 추락은 대기업으로 부메랑이 돼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세트 업체인 국내 대기업의 성장에는 부품을 공급해주는 중소·중견기업의 피와 땀이 함께 서려 있다. 고질적인 가격 후려치기로 대기업이 욕먹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웅다웅 싸워가면서 고품질의 부품을 해외 업체보다 싼 가격으로 공급해 온 중소·중견기업의 공헌이 한국 제조업 생태계의 최대 강점 중 하나였다. 그런 기업들이 무너지면 대기업도 무사할 수 없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한 임원은 올해 들어 매출이 감소세로 돌아섰다고 한숨에 땅이 꺼졌다. 그는 온 국민이 먹고 마시는 비용을 줄이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했다. 돈을 안 쓰겠다고 하는 것에는 뾰족한 방책이 없어 속수무책이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규직으로 바뀐 근로자들 사이로 양대 노총이 자리를 잡았다. 회사에 대한 간섭이 이만저만 아니어서 괴롭다고 했다. 노무담당 임원은 이미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회사를 떠났다.

기업 현실이 이렇게 냉엄한데, 일본의 경제 보복까지 터졌다. 일본이 겉으로는 전략물자 수출 통제 부실을 이유로 대고 있지만 위안부 문제에 이은 강제징용 문제 처리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근본적인 원인은 터치하지 않은 채 경제·통상 논리로만 맞대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외교적 분풀이에 경제적 허점을 활용하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비겁함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기업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체면이 구겨질까 정공법을 회피하는 청와대의 아집도 정도(正道)는 아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보복을 기업들이 감내하고, 기업들이 해결하라고 한다. 핵심 소재·부품업체를 키우지 못한 것도 기업 탓이고, 일본을 설득하는 것도 기업 몫이라고 몰아붙인다. 최저임금 급등에 주52시간 근무 법제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수출·내수 경기 부진에 지칠 대로 지친 기업들의 기(氣) 살리기 대책은 세우지 못할망정 일본을 핑계로 다시 윽박만 지르고 있다.

기업이 생존하기 어려운 나라에서 경제가 크기 어렵고, 일자리가 늘어날 리 만무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젊은이들 몫이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고 자조하는 우리의 아들딸들은 어떡하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정혁훈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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