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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이슈 양승태와 '사법농단'

양승태, 첫 재판서 23분간 작심 발언..."이토록 잔인한 수사, 한국 말고 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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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열린 자신의 첫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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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법정에서 23분간 작심 발언했다. 그는 "공소장은 법률가가 쓴 문서이지만 제가 보기엔 미숙한 법률자문을 받아 한 편의 소설을 쓴 것"이라며 "법적 측면에서 허점과 결점이 너무 많아서 결국 공소 전체를 위법한 공소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심리로 29일 진행된 첫 공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이 같이 말하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그리고는 검찰 공소장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 재판 절차나 법관의 자세에 대해 (검찰이) 너무나 아는 게 없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며 "공소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휘하 심의관들한테 몇 가지 문건과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게 직권남용이라고 끝을 낸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어 "저를 찾아온 많은 법조인들에게 공소사실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며 "공소사실은 어디 가고 문건 작성한 것을 직권남용이라고, 재판 거래를 했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느냐"며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용을 그리려다가 뱀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격"이라고 했다. 또 "이러한 포장이 300여쪽에 이르는 공소장에 넘쳐흐르고 있다"며 "우리 사회에서도 보잘것없는 내용으로 포장만 그럴싸하게 내놓은 상품들이 있다. 그러한 포장들이 다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것인데, 이 사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공소장 내용 곳곳을 직접 거론하며, 공소사실 혐의 특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소장 문장에 ‘등'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아 피고인은 무엇으로 방어를 하고 재판부는 무엇으로 심리를 하느냐"며 "마치 권투를 하는데 상대방의 눈을 가리며 이쪽에서는 두 세 사람이 상대를 때리는 격"이라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또 "심지어 내 전임 대법원장 시절 이야기까지 들추어냈던 것도 (공소장에서) 발견했다"며 "이것이 과연 수사인가. 사찰이 있다면 이런 것이 사찰"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어떤 사람에 대해 처벌 거리를 잡아내기 위해서 하는 수사는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수사"라며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수사야말로 권력의 남용"이라고 했다.

이어 양 전 대법원장은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민주절차를 채택하고 시행하는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서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대한민국 외에 어디에 더 있는지 묻고 싶다"면서 "법원에 대해 이런 수사를 할 지경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한테라도 이런 수사를 못하겠느냐. 국민들한테는 중대한 위협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양 전 대법원장은 "이 모든 게 유죄가 된다면 공직사회에서 일을 하고 싶어하는 공직자들은 나날이 직권남용죄를 쌓아가고 있는 꼴"이라며 "비대해지는 검찰권 앞에 누구도 이제는 대적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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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법정으로 향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증오하는 권력에 대해서 공포심 때문에 복종하는 것만큼 비참한 나라가 없다’

다소 격앙된 양 전 대법원장은 프랑스 역사가 앙드레 모루아가 쓴 ‘영국사’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법의 지배가 이뤄지고 법이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그 아래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민주주의가 유지될 것인가, 아니면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검찰의 칼날에 숨을 죽이고 혹시 그 칼날이 자기한테 향해 있는지를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할 ‘검찰 공화국’이 될 것인가. 최근 이뤄지는 몇 건의 재판이 바로 이런 앞날을 결정하게 되리라고 저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낸 양 전 대법원장은 한참 숨을 고른 뒤 "작년에 입적한 제가 존경하는 불교계 고승이자 우리나라 시조문학계를 이끈 오현 시인이 ‘마음 하나'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 옛날 천하장사가 천하를 다 들었다 다 놓아도, 모양도 빛깔도 향기도 무게도 없는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다’고 했다"며 운을 뗐다. 그리고는 "저는 최근 저를 비롯한 몇몇 사람에게 쏟아지는 도를 넘은 공격에 대해 이런 마음 하나로 견뎌 왔다"면서 "그러나 요즘 보니 이런 마음 하나로 견뎌야할 사람이 저뿐만 아닌 것 같다. 재판부에서 잘 관철해서 피고인들의 마음에 지장이 없도록 적절한 판단을 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백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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