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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시험지 깨알 메모 등 증거 충분"… 쌍둥이 아빠에 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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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답안 두 딸에 유출한 혐의… 前교무부장에 징역 3년 6개월

"교육에 대한 신뢰 떨어뜨려"

조선일보

쌍둥이 딸 중 동생이 ‘운동과 건강생활’ 시험지에 미리 암기한 것으로 보이는 정답을 작게 적어놨다(빨간 원 안). /수서경찰서


"피고인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피고인을 징역 3년 6개월에 처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딸들에게 시험 정답을 유출한 혐의(업무방해)로 구속 기소된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 현모(53)씨는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4단독 이기홍 판사가 실형을 선고하자 표정이 굳어졌다. 피고인석에 서서 선고를 듣던 그는 잠시 얼어붙은 듯했다. 쌍둥이 딸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숙명여고 졸업생 10여 명이 방청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쌍둥이 딸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 사건은 현씨의 쌍둥이 딸이 지난해 치른 2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나란히 문·이과 전교 1등을 차지하면서 불거졌다. 1학년 1학기에는 문과 전교 121등, 이과 전교 59등이었던 이들의 성적이 급상승하자 학부모들이 의혹을 제기했고, 결국 수사로 이어졌다. 검찰은 이 학교 교무부장이던 현씨가 2017~2018년 쌍둥이 딸들에게 다섯 차례에 걸쳐 정기고사 시험 답안을 알려줬다고 보고 그를 기소했다.

현씨는 혐의 자체를 부인했다. 학교 방범 카메라에는 그가 시험지를 빼돌리는 정황이 찍힌 증거가 없었다. 수사 과정에서도 그가 시험 답안을 유출했다는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현씨는 법정에서도 혐의를 부인했다. 쌍둥이 딸들도 지난달 23일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실력으로 1등을 했는데 아버지가 교무부장이라는 이유로 모함을 받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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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도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어떻게 정답이 유출됐는지 전말은 파악되지 않지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에 의해 딸들이 미리 정답을 알고 있던 사정은 인정된다"며 "이는 결국 현씨를 통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러 정황 증거로 볼 때 시험지 유출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재판부가 언급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중 하나는 쌍둥이 딸들이 똑같은 시기를 기점으로 성적이 급격히 향상됐다는 점이다. 반면 비슷한 시점에 치른 모의고사에선 중간·기말고사처럼 괄목할 만한 성적 향상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를 내신에 반영되는 정기고사 정답만 딸들에게 유출한 정황으로 판단했다.

쌍둥이 딸들은 유독 서술형 문제를 틀렸는데 재판부는 "서술형 답안의 경우 오래 봐야 해서 유출하는 것이 까다로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딸들은 시험지 윗부분에 미리 암기한 정답으로 의심되는 5줄의 숫자를 매우 작은 글씨로 적어놓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를 '깨알 메모'라 부르며 "사전에 암기한 정답을 메모한 정황"이라고 했다. 이 메모가 가채점을 위한 것이었다는 현씨 측 주장에 대해서도 "가채점에서는 문제마다 맞았는지를 표시하는 것이 통상적인데, 굳이 정답을 적어두고 다시 채점하는 이중의 수고를 했다는 것은 경험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쌍둥이들이 공교롭게 시험 직전 정답이 바뀐 문제만 기존 정답을 표기해 똑같이 틀린 것도 중요 증거 중 하나였다. 특히 쌍둥이 동생은 물리 시험에서 암산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시험지에 풀이과정 하나 적지 않고 맞혀 혼자 만점을 받았다.

재판부는 "1년 전에는 풀이 과정을 쓰고 풀어도 만점을 받지 못한 평범한 학생이 단지 암산만으로 만점을 받을 천재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물리 대회 입상 자료도 없고 풀이 과정을 쓸 만한 실력도 없어 정답만 암기하고 푼 것"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또 정기고사 출제 서류 결재권자인 현씨가 시험 답안을 넣어둔 교무실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고, 추가 근무를 핑계로 주말이나 일과 후에 교무실에 홀로 남아 있으면서도 일지를 기록하지 않은 정황 등을 봤을 때 금고를 열어봤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현씨의 범행으로) 교육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저하됐고, 교육 현장에 종사하는 교사들의 사기도 떨어졌다"며 중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박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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