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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유레카] ‘여자경찰서’에서 ‘대림동’까지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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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임정 100년을 맞아 경찰청 로비에 전시 중인 ‘민주·인권·민생 경찰의 뿌리’에선 몇몇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안창호 선생의 조카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안맥결 서울여자경찰서장, 한국애국부인회 회장 출신 양한나 수도여자경찰서장 등이 그들이다. 요즘으로선 상상도 어렵지만, 1947년부터 10년간 우리나라엔 ‘여자경찰서’가 있었다. 1946년 7월1일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신설된 데 이어, 그다음 해 서장부터 순경까지 모두 여경으로만 구성된 여자경찰서가 서울·부산·대구·인천에 설치됐다. 이들은 부녀자 및 아동 대상 업무나 보호를 맡았는데, 특히 부녀자 사건 처리에는 여경의 동석 규정도 있었다. 지금 눈높이로는 여경에 특정업무만 맡기는 걸 비판할수 있겠지만, ‘인권’ 개념이 드물던 당시로선 선진적인 제도였던 셈이다.

미군정이 주도한 여경 창설 구상에 처음에 조선인 경찰 간부들은 반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1946년 4월 서울 곳곳에 여경 간부 모집 안내문이 붙어버리자, 경찰은 ‘좌익 여성’의 지원을 막기 위해 미군정을 설득해 공모제를 추천제로 바꿨다.(<경향신문> 1977년 5월6일치, ‘비화 한세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지금과 비교도 안 되던 시기, 여경들은 스스로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교육 뒤 전부 ‘간부’로 뽑겠다던 약속과 달리 여자경찰서 설치 전까지 이들은 일반서에 흩어졌다. 좀체 일이 주어지지 않자 이들은 거리에 나가 여성계몽운동가 같은 역할을 하고 구호품 모으는 일에도 앞장섰다.

여경의 등장은 ‘달라진 세상’을 상징하는 풍경이기도 했다. 제복을 입고 나서면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고, 사람들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지원자가 부족했던 특기생 때와 달리, 1기생 모집엔 100명이 몰렸다. 교사 출신의 정복향은 필기시험에 수석합격하고도 기혼에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불합격되자 강력히 항의한 끝에 결국 초대 대구여자경찰서장까지 된 사례다.

5기까지 배출된 여경은 500명, 전체 경찰은 3만명이었다. 여경 비율이 1995년 1.5%였으니, 오랜 세월 1940~50년대에도 못 미쳤던 셈이다. 경찰은 현재 11.3%인 여경 비율을 2022년까지 15%로 올릴 계획이다. 영국(28%), 독일(23.7%), 미국 워싱턴(25%) 등엔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경찰대와 간부후보생의 통합선발도 내년에야 처음 실시된다. 경찰이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밝힌 ‘대림동 사건’을 두고 ‘여경 폐지론’까지 나오는 걸 보면, 도대체 지금이 몇년도인가 싶다.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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