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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해보니 시리즈 80] 학교 앞에서 자취 감추는 문방구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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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주변 문방구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뽀얗게 먼지 쌓인 채 '추억'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된 문방구에 가봤다.

◆ 이 근처엔 없고, 저기 ○○ 아파트 단지까지 가야 있어요

규모가 제법 큰 서울 강서구의 한 초등학교 앞. 기자가 졸업한 학교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문방구 자리에는 카페가 생겼다. 학교 보안관은 "이 근처에는 문방구가 없다"면서 제법 먼 아파트 단지에 딱 한 개 있다고 알려줬다.

한 자리에서 15년간 문방구를 운영한 문구점 주인 A 씨는 "난 별로 길게 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90년대 초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문구점이 생겼고 상가에 학원도 많아 장사가 정말 잘 됐다.

그러나 지금은 한 반에 20명, 한 학년에 100명꼴인 학교 하나 바라보고 문구점을 하는 거라 '장사가 잘된다 안 된다'라는 판단 자체가 무의미하다.

한때 라이벌(?) 관계였던 맞은편 문방구는 재작년에 폐업했다. 상가에 있던 영어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고정 고객이던 아이들이 사라져 타격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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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책? 여자애야 남자애야? 여자애는 이 분홍색 쓰고 남자애는 파란색 쓰는 거야"

양천구 문방구 주인 B 씨는 조카의 공책을 사려는 기자에게 "여자용 남자용 공책이 있으니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래 장사해서 알아, 여자애한테 로봇 공책 주면 싫어한다니까?"

아이들의 등교 시간인데도 문방구는 한산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하나가 들러서 작은 장난감을 하나 사 갔을 뿐. 아이들이 찾지 않는 학용품에는 먼지가, 밖에 내놓은 색칠공부와 퍼즐은 빛이 바래서 원래의 색을 잃었다.

2011년부터 학습 준비물을 학교가 일괄 구매하면서 문방구는 1차 타격을 받았다. 아침에 아이들이 준비물을 사가려 문방구에 들리는 풍경이 사라진 것도 이때다. 학년 초나 학기 초에 필수 준비물(공책, 연필, 리코더 등)은 문방구에서 사지만 그 정도로는 문방구 유지가 힘들다. 한때는 문구점 폐업이 '문제'라며 교육청에서 100만 원 이하 공동 구매 물품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매하도록 권고했지만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B 씨는 "애들이 없어 요새. 애들이 진짜 없어"라고 말했지만, 대형 마트에서도 공책을 팔고 다이소에서도 학용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된 것도 문방구의 쇠락을 앞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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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방구 → 문구점 → 팬시점

문방구라는 표현은 90년대에도 이미 낡은 단어였다. 문방구는 '문구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귀여운 캐릭터용품 잡화를 파는 가게들이 생기자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문방구 간판에 '팬시'라는 단어를 붙였다. 그마저도 지금은 사무용품 가게와 대형마트, 온라인에 밀려 간판을 바꿔 다는 일로는 해결되지 않는 재고가 쌓여갔다.

문방구의 풍경은 다 비슷하다.

좁은 자리에 빼곡히 들어찬 각종 학용품에 공중에 매달린 배드민턴 채, 비닐에 싸인 돼지저금통들이 주렁주렁 달린 풍경.

훔쳐 가기 쉬운 고가의 펜은 언제나 문구점 주인의 시선과 손이 닿는 곳에 자리한다. 최신 유행하는 슬라임이나 캐릭터 카드 정도만 바깥쪽에서 어린이 손님을 유혹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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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문방구를 점령한 뽑기나 오락기, 슬러시도 점점 자취를 감추는 추세다.

문방구 주인 C 씨는 "핸드폰 들고 다니는데 이런 게임 하겠냐? 오히려 어른이 하더라"라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방구라고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학교의 학습 준비물 공동구매에 줄어들던 수입을 메꾸는 방법은 소위 '불량식품'이라고 불리던 과자와 슬러시 기계였다. 한 개에 300원 정도 하는 아이스크림도 인기 메뉴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반드시 척결해야할 4가지 사회악 가운데 하나로 '불량식품' 척결을 내세우면서 문방구도 불량식품 판매 이미지로 타격을 입었다. 한때 쏠쏠한 벌이였던 슬러시 기계는 휴게음식점 영업 신고를 하고 영업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문방구 주인들이 나이가 든 경우가 대부분이 귀찮은 일을 벌이려 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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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계청,「전국사업체조사」

◆ 문방구 '폐업' 소식에 달려가는 사람들

찾는 발길이 줄어든 문방구는 결국 악성 재고를 남기고 문을 닫는다. 2006년부터 2016년까지 통계를 보면 문방구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폐업하지 않더라도 같은 자리에서 지하로 매장을 옮긴 경우도 있다. 임대료 상승에 따른 지출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이다.

폐업 소식을 알리면 전국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어린이 손님이 아닌 30~40대 어른 손님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에 갖고 놀던 '장난감'을 '득템'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프라모델, RC카, 고무동력기…. 이제 생산되지 않는 물건들을 먼지를 걷어내고 가져간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문방구로 알려진 종로구 '보성 문구점' 주인은 "문방구 다 없어졌는데 또 여기는 오래됐다고들 찾아오는데 다른 거 없다"고 말했다.

보성 문구사는 사실 1년 전 근처에서 문방구를 하던 '아림사' 부부가 인수했고 간판도 '아림사 문구점'이라고 바꿔 달았다. 건물을 그대로 보존해 여전히 유일한 '한옥 문구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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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문구사는 나이 든 분이 운영해 교련복이나 배지 등 추억의 아이템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놔둬 언론에 주목을 받았지만, 나이가 들어 운영이 어려워지자 아림사 부부에게 가게를 넘겼다.

부부는 물건을 그대로 받아 운영 중이지만 간판을 새 걸로 바꿔 달아도 어린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가는 손님은 적고 동네 사랑방처럼 오다가다 들려 문구 잡화를 사가는 손님이 더 많다.

"보성문구사 양반이 이곳저곳에서 문구점 한 경력이 50년이라는 거고 이 자리에서 한 건 우리가 더 오래됐어. 98년에 한옥 부수고 새 건물 올려서 새것처럼 보인 거지 개천 덮기 전부터 있었다니까? 원래 여기가 개천 있었어!"

◆ 문방구 주인들 "애들이 없어" "왁자지껄한 소란이 그리워"

문방구 주인들은 공통으로 장사가 안되는 원인을 "애들이 없다"는 것으로 꼽았다. 대형 마트도 온라인 몰도 애들이 많으면 손님을 좀 뺏겨도 괜찮을 텐데 이제는 애들이 없는 게 피부로 왜 닿는다고 말했다.

한 학부모는 "급히 사려는 준비물은 그래도 학교 앞 문방구가 있어야 편하다"면서도 대형 마트에 간 김에 애들 학용품을 대량으로 구매해둔다고 말했다.

애들이 찾지 않으니 먼지가 쌓이고, 쌓인 먼지는 안 그래도 낡은 문방구에 더 낡은 이미지를 입혔다.

아이들이 많이들 떠난 자리여도 문방구 주인은 단골 꼬마 손님을 기억하고, 어느새 훌쩍 자란 지난날의 어린이 손님을 어색한 존댓말로 맞이한다. 추억을 만지작거리는 기자의 손길에 문방구 주인이 한마디 던졌다.

"천천히 놀다 가~"

YTN PLUS 최가영 기자 (weeping07@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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