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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5·18은 광주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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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젊은 나이에 몸을 던진 학생열사들

김의기·김태훈·최종철·송광영·이동수·박태영·이한열…

광주항쟁의 진실 알리고 1987년 항재의 불씨로

열사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재조명 계승작업 필요

광주CBS 조시영 기자

노컷뉴스

5.18국립민주묘지(사진=노컷뉴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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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전국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학생, 노동자, 사회운동가들이 목숨까지 내놓으며 오월 정신을 계승했다. 5·18 39주년을 맞아 광주 CBS는 잊지 말아야 할 전국의 민족민주열사들을 재조명해보는 기획보도를 마련했다. 15일은 첫 번째 순서로 젊은 나이에 몸을 던진 학생열사들에 대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젊은 나이에 몸을 던진 학생열사들
(계속)


5·18민주화운동 이후 맨 처음 광주의 진실을 외치며 목숨을 끊은 이는 경북 영주 출신의 21살의 대학생이었다.

당시 서강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 열사는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광주 학살에 항의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했다.

1981년 5월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에 투신해 숨진 김태훈 열사.

김태훈 열사의 마지막 외침은 "전두환 물러가라" 였다.

부산대학교에 재학 중인 최종철 열사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돼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대전교도소, 영등포교도소를 전전하면서 가열찬 투사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최 열사는 1981년 5월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4개월도 채 안되서 생을 마감했다.

2018년 6월 범국민추모제 봉안대상자 699명 가운데 1980년 5·18민중항쟁 이후 돌아가신 열사 희생자는 전체의 83%인 581명에 이른다.

1992년 창립된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를 중심으로 열사들의 정신계승을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광주전남연대회의 김순 집행위원장은 "열사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민간 차원의 다양한 추모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황망하게 가버렸는데, 과거 군사정권이 간첩프레임을 씌워버려 유품을 불태우기도 해, 열사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유품조차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식 때 전국의 열사들을 호명해줘 많은 이들이 잊혀졌던 열사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며 "현재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는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컷뉴스

(사진=5.18기록관 제공)


1985년 경원대 재학 중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분신한 송광영 열사, 1986년 서울대 재학 중 "전두환을 처단하자"고 외치며 분신한 이동수 열사, 1987년 목포대 재학 중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1인 시위를 42일 동안 하면서 끝내 분신한 박태영 열사, 1987년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

이들 학생 열사들의 투쟁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돼 전국민적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5·18은 광주 만의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 전체의 것이다"면서 "역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어가야 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잊지 않게 기억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잊혀지고 있는 이들 열사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재조명과 계승작업이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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