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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본의 영웅, 조선의 원흉들이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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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⑫메이지유신의 주역 조슈 5걸(長州五傑)

조선일보

서구 제국주의 격랑이 아시아를 덮치던 19세기 말,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해 강국(强國) 대열에 합류했다. 조선은 일본의 강국 건설 과정에서 제물(祭物)이었다. 왜 한 나라는 다른 나라의 심장을 도려내 제단에 올려놓았고, 왜 한 나라는 제사상에 올라야 했는가. 서기 1543년 철포(鐵砲)에 대한 선택에서부터 엇갈린 두 나라 운명이 300년 뒤 한갓진 일본 시골 동네에서 재회한다. 훗날 조선을 식겁하게 만든 이 동네 이름은 조슈번(長州藩) 하기(萩)다.

시골 서당 쇼카손주쿠 동문들

1858년 어느 날 동네 훈장이 운영하는 서당에서 청년들이 공부를 한다. 여섯 평짜리 서당 기둥에는 그날그날 뉴스가 적힌 '히지초모쿠(飛耳長目·비이장목)' 공책이 걸려 있다. 히지초모쿠는 '멀리 듣고 멀리 보는 관찰력과 견문'을 뜻한다. 대개는 다다미방에 앉아 있는데 가끔 문턱 밖에 서서 강의를 듣는 아이도 있었다. 학교 이름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다. 사람들은 이 학교 학생들을 '난민(亂民)'이라 불렀다.(이치사카 다로·一坂太郞, '다카스기 신사쿠와 조슈') 그럴 만했다. 스물여덟 먹은 훈장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문제가 많았다.

1851년 나이 스물한 살에 번주 허가 없이 에도(江戶)와 일본 동북쪽 땅을 여행하는가 하면(당시 일본은 자기 소속 번 이탈이 금지돼 있었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가 흑선을 몰고 오자 밀항을 시도하다 실패해 체포되기도 했다. 14개월 옥살이 끝에 출옥한 이 망나니에게 학부형 그 누구도 자기 아이를 맡길 까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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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마구치현 하기(萩)시에는 조슈번 하기 고성(古城) 유적이 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군으로 싸웠다가 변방으로 쫓겨난 모리 가문이 만든 성이다. 복수를 벼르던 조슈번 번주와 무사들은 260년 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다. 1874년 '폐번치현'을 주도한 조슈번은 권력을 천황에게 넘기고 성을 파괴했다. 성은 복원되지 않은 채 폐허로 남아 있다. 260년 만의 복수극이며 동시에 근대 국가 일본을 만드는 혁명이기도 했다.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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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하고 두 달 운영됐던 난민 학교에 등교한 학생은 모두 90명 정도다. 부모 눈을 피해 야밤에 통학했던 청년은 이름이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다. 다카스키는 1866년 2차 조슈-막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최대 장애였다. 한 동네 살며 요시다에게 배웠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또한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메이지 유신 3걸로 불리는 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천민 출신이라 사무라이들 눈치를 보며 문지방 밖에 서서 강의를 듣던 청년들 이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이토 슌스케(伊藤俊輔)다. 이곳 1년이 학력의 전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훗날 일본 육군을 창설하고 총리가 되었다. 역시 쇼카손주쿠 수업이 전부인 이토 슌스케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총리가 되었다. 그가 조선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다. 소름 끼치지 않는가. 일본의 영웅들, 그리고 조선의 원흉들이 이 작은 마을 하기의 이 작은 학교 동문들이라니.

260년을 기다린 복수극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10월 21일 동서로 갈라진 일본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단 하루 만에 끝난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이 도요토미 세력을 지지하는 서군에 승리했다. 서군에 가담했던 모리 데루모토는 히로시마 너른 평야에서 척박한 북서쪽 해안으로 쫓겨났다. 그곳이 지금 야마구치현 하기다. 모리 가문은 북쪽 바다에 솟은 산기슭에 동북쪽 막부 방향으로 성을 쌓고 도쿠가와 막부에 이를 갈았다. 해마다 신년이면 하기성에서는 "올해는 막부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기다리자"는 대화가 국민의례처럼 오가고 정식 다례를 시작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조슈번의 큰 그림, '막부 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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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6월 27일 영국으로 밀항한 조슈(長州) 유학생 5명.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은 영국에 참패했다. 대항해시대를 거쳐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구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완전히 역전한 시대였다.

1801년 영국 페이튼 함대를 시작으로 무장 함선이 일본에 출몰했다.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에서 무역을 독점하던 네덜란드 상인과 청나라 상인들은 연일 세계정세를 막부에 보고했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가 에도 앞바다에서 함포를 쐈다. 1863년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막부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사가번)와 시마즈 나리아키라(사쓰마번)가 앞장서서 용광로를 만들고 군함과 대포를 만들었고 영국과 미국으로 유학생과 견문단을 보내 유럽을 배웠다. 이유는 명쾌했다. '약하면 먹힌다.'

조슈의 각성은 조금 달랐다. 서양에 무릎 꿇는 막부를 목격한 조슈 지도자들은 막부 타도를 계획했다. 260년 만에 찾아온 복수의 기회이기도 했고 동력이 끊겨가는 일본을 개혁할 기회이기도 했다. 단순한 강병책이 아니라 혁명적인 제도 개혁이 필요했다. 그 기회를 찾아낸 사람이 망나니 교장 요시다 쇼인과 제자들이었다.

쇼인 교장이 하는 강의는 젊은 '난민'들 심장을 뛰게 하는 바가 있었다. '성현의 말을 따라 충효심을 기르고, 나라를 위협하는 해적(海賊)을 멸하자'는 것이다. 이름하여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이다. 서양 제국주의에 위협받는 아시아 국가들 꼬락서니는 히지초모쿠를 통해 매일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미국 함포 사격에 강제로 개항 당한 일본의 미래를 망나니 교장 쇼인은 이 난민들에게서 찾으려 했다.

다카스기의 각성

1854년 페리 함대가 왔을 때 요시다 쇼인은 에도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번을 이탈해 전국을 주유하며 각 번 학자들에게 세상을 배우고 난 이후였다. 엄청난 무력에 압도된 요시다는 즉각 함선에 올라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요구는 거부되고 요시다는 체포돼 하기로 압송됐다. 번번이 법을 어긴 요시다를 번주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는 처형하지 않고 살려주곤 했다. 그런데 막부는 1859년 막부 요인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 암살 기도 사건으로 요시다 목을 베어버렸다. 1년 2개월 짧은 기간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조각난 시신을 운구해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들은 각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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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4월 27일 수제자 다카스기 신사쿠가 청나라 상해로 파견됐다. 정세 파악이 목적이었다. 도착 직후 다카스기는 외곽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연합군 포성이었다. 5월 21일 다카스기는 일기를 쓴다. "상해는 중국 땅임에도 외국인이 중국인을 부려 먹는다." 이틀 뒤 또 일기를 쓴다. "영국인이 다리를 만들어 통행료를 받고, 공자묘에 영국군이 병영을 구축했다. 너무도 개탄스럽다."(다카스기 신사쿠, '遊淸五錄·유청오록') 연속된 충격은 위기감으로 바뀌었다. 위기감은 일본의 총체적 개혁이라는 자각으로 바뀌었다.

시모노세키 전쟁과 조슈 5걸의 밀항

1863년 5월 10일 조슈 해군이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서양 상선에 포격했다. 전쟁이 터지고 조슈가 판정패했다. 막부의 양이(攘夷) 명령에 따른 조치였다. 한달뒤 조슈번은 무사 계급 다섯 명을 영국으로 밀항시켰다. 막부 허가 없는 도항은 반역이었지만 강병에 대한 욕구가 더 컸다.

6월 2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가 요코하마에서 영국 화륜선에 올랐다. 이들은 에도에 있는 조슈번 사무실에서 공금을 훔쳐 경비로 썼다. 이들은 사무실에 "부정하게 돈을 가졌으나 살아 있는 무기로 돌아오겠다"고 편지를 남겼다.(이광훈,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

긴 항해 끝에 런던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고층빌딩과 기차와 가스등이 즐비한 야경에 충격을 받았다. 군사력을 강화해 서양에 맞서려던 계획은 그 순간 사라지고, 두려움이 이들을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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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하기(萩)시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만든 사립학교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인은 이 서당에서 존왕양이와 막부 타도를 내건 혁명가 집단을 길렀다. 1년 2개월 남짓 운영된 이 학교에서 일본 근대사의 핵심 세력이 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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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칼리지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조슈번이 2차 시모노세키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며 급거 귀국했다. 다섯 모두 귀국하려 했지만 이토가 "미래를 위해 누군가는 배워야 한다"고 말렸다. 귀국 도중인 1864년 8월 전쟁이 터졌다. 조슈번은 참패했다. 정전협상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맡았다. 다카스기는 "조슈군은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며 배상 책임을 막부에 돌렸다. 막부 권위는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조슈 파이브' 혹은'조슈 5걸'이라고 불리는 런던 유학생들은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혁명을 주도해나갔다.

다카스기의 헌신

조슈번의 거듭된 반막부 과격행동에 막부는 조슈 정벌 전쟁을 준비했다. 1864년35개번 15만 대군을 동원한 첫 번째 전쟁은 조슈가 항복하며 무혈로 끝났다. 1866년 두 번째 전쟁은 1차전 항복을 주도한 다카스기가 주역이었다. 시모노세키 옆 작은 절 고잔지(功山寺)에서 거병한 다카스기는 동서남북에서 밀려오는 막부군을 완파했다. '하늘을 돌린다(回天·회천)'는 그의 선언대로, 서양에 무릎 꿇고 조슈번에 무릎을 꿇은 막부는 이후 힘을 잃었다. 앙숙이던 사쓰마도 조슈와 함께 막부 타도 연합전에 뛰어들었다. 다가스키의 회천 거병은 혁명 세력이 정국을 휘어잡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듬해 다카스기는 폐결핵으로 죽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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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뿌린 피로 완수한 혁명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1867년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며 선수를 치자 이들은 천황 명의로 왕정복고를 선언했다. 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인 1869년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주도해 영토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납했다. 그리고 1871년 이들 번은 번의 모든 권력을 폐기하고 번을 행정구역으로 격하시켰다. 1874년 메이지정부는 이들 건의를 받아들여 각 번의 성을 철거했다. 첫 번째로 성을 부순 곳은 야마구치현, 옛 조슈번이었다. 260년 전 원수를 갚고, 혁명 완수와 함께 옛 권력에 대한 향수를 지워버린 것이다. 소름 끼치지 않는가. 그들이 조선의 원흉이 되었다. 정말 소름 끼치지 않는가.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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