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14 (월)

[강진구의 고전으로 보는 노동이야기](18)양들이 ‘장미꽃’ 못 먹게 하려면 ‘비정규직 제로’ 초심 되새겨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른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동화책이다.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 친구지만 먹고살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린 시절 꿈과 함께 길을 잃어버렸다.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와 어린 왕자의 만남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조종사가 먹고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어른을 상징한다면 어린 왕자는 어른들 마음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이다. 조종사는 마실 물이 일주일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비행기를 수리하느라 끙끙대는 반면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홀로 남겨놓은 장미꽃을 양들이 먹어치울까 불안하다.

어린 왕자는 처음에 조종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다가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정말이야” “양은 가시가 있는 꽃도 먹겠지” “그럼 가시는 어디에 소용되지”라며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비행기 수리에 온통 신경이 곤두선 조종사는 마지못해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마침내 화를 내고 만다. “그만해둬. 아무래도 좋아, 난 되는 대로 대답했을 뿐이야. 나에게 지금 중대한 일이 있어.”

조종사의 갑작스러운 짜증에 어린 왕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중대한 일이라고. 아저씨는 어른들처럼 말하고 있잖아. 나는 시뻘건 얼굴의 신사가 살고 있는 별을 알고 있어. 그는 꽃향기라고는 맡아본 적이 없어. 별을 바라본 적도 없고. 어느 누구를 사랑해본 일도 없고. 오로지 계산만 하면서 살아왔어. 그래서 하루 종일 아저씨처럼 ‘나는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되뇌고 있고. 그는 사람이 아니야. (뿌리 없는) 버섯이지.”

경향신문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약속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노동존중 정부가 2년 만에 불시착한 이유는 밥을 데우는 데만 익숙한 관료와 전문가들이 노동정책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3월 임시국회에서 탄력근로제 확대 법안 처리에 실패하자 “중요 법안이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며 “경제계도 빨리 처리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노동계에서 ‘공짜 야근·과로사법’으로 불리는 법안을 전경련·경총 등 경제단체의 압박에 떠밀려 처리를 시도하면서 ‘나는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되뇌고 있는 것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한발 더 나갔다. 그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많은 국민들이 절망하고 있다. 단순히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연장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주 52시간에 대해서 재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 틈을 비집고 재계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이 1년으로 늘어날 경우 일자리 9만1000개, 임금소득 1조3000억원, GDP 2조6000억원의 감소를 막을 수 있다”는 ‘계산서’를 들이밀었다. 어린 왕자 눈에는 모두 꽃향기 대신 돈 냄새에 취한 시뻘건 얼굴의 신사들일 뿐이다.

어린 왕자는 이런 숫자의 마력에 빠져 있는 어른들을 상대로 양이 꽃을 먹어치우는 게 왜 중요한지 설명한다. “수백만개 별들 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는다면 갑자기 모든 별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그게 중요하지 않단 말이야.”

꽃을 지키기 위한 어린 왕자의 절박함은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를 연상시킨다. 그는 미술평론가 조르주 샤르보니에와의 대담에서 생산의 크기, 총인구수 등 메마른 지표로만 사회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선을 비판했다. “원시사회든 문명사회든 외부지표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회란 모든 종류의 뉘앙스로 가득 차 있죠. 한 개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외부에서 볼 때 하나의 죽음은 진부한 사건일지 모르지만 가족과 친척들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일입니다.”

3시간마다 한 명씩 일하다 죽는 사람이 나오는 노동현실에서 산재 사망사고는 특별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산재 피해자 가족들이나 동료들에겐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사건이다. 탄력근로제 확대를 옹호하는 전문가나 정치인 가족들 중 누군가가 과로로 쓰러지는 사고를 당했다면 주 52시간제의 재논의를 쉽게 입에 올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향신문

생텍쥐페리


어린왕자는 꽃을 지키려 하고

조종사는 비행기 수리에 몰두

무엇이 ‘중요한 일’이냐 질문


일상 변화시킨 최저임금 인상

정부는 고용동향·경기지표보다

비정규직의 내면 들여다봐야


관료·전문가들 노동정책 주도

일자리 등 숫자가 ‘중요한 일’로

노동존중 정부 2년 만에 불시착


어린 왕자가 지구에 도착한 후 실망한 것은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던 장미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가 다시 생기를 되찾은 것은 여우와 친구가 되면서부터였다. 여우는 친구가 된다는 건 서로 상대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길들임은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이용하는 의미가 아니라 관계 맺음을 통해 서로가 특별하고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여우에게 어린 왕자는 수많은 어린이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친구가 되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어린 왕자의 발소리는 굴 밖으로 여우를 불러내는 음악소리가 됐고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칼은 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마지막 작별인사에서 다짐받듯 당부의 말을 한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란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그것을 잊어선 안돼.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넌 네 장미에 대한 책임이 있어.”

간접고용 노동자가 비인간적인 처우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숫자로만 취급되기 때문이다. 원청 입장에서 하청노동자는 근로계약서를 쓸 필요도 없고 서로 길들일 필요도 없고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 하청노동자는 단지 용역단가를 책정하기 위한 숫자이며 산재가 발생하면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수많은 부속품 중 하나일 뿐이다.

얼마 전 정의당 이정미 대표 주최로 열린 ‘비정규직 현장 노동자 증언대회’에서 쌍용양회 공장 소속 한 하청노동자의 증언에 방청객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일하다 이마에 쇳조각이 박혔는데 관리자는 물로 씻어내면 된대요. 퇴근 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출근하니 화를 내는 거예요. 공연히 병원까지 가서 ‘일하다 다쳤다’고 얘기를 해서 회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뿐만 아니에요. 소음 때문에 청력에 이상이 온 걸 알고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숨기고 일하는 동료들이 있어요. 관리자가 이상하다 싶으면 등 뒤에서 ‘귀머거리’라고 놀리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불구새끼’라고 하고 다음날 해고를 통보합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과 이별한 후 새 친구를 찾기 위해 지구에 오기 전 여섯개 별을 방문했지만 이상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은 모두 신하로 삼으려는 왕, 칭찬에 굶주린 광대, 주정뱅이, 쉴 새 없이 별들 숫자를 세고 종잇조각에 그 숫자를 적어 서랍에 보관하는 장사꾼, 변화를 두려워하는 학자. 이 중 어린 왕자가 친구로 삼고 싶었던 사람은 가로등지기였다. 다른 별 사람들과 달리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로등지기는 ‘시간의 감옥’에 갇혀 어린 왕자의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난 정말 고된 직업을 가졌어. 전에는 아침에 불을 끄고 저녁이면 다시 켰었지. 그래서 낮에는 쉬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있었거든. 그러나 이제는 이 별이 일 분마다 한 바퀴씩 돌기 때문에 단 일 초도 쉴 새가 없는 거야.”

어린 왕자는 그를 돕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지기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팬옵티콘(원형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그의 별은 너무 작아서 두 사람이 있을 자리도 없었고 끊임없이 감시를 의식하며 일을 해야만 했다.

지난 15일 ‘비정규직 이제 그만 1100만 공동투쟁’ 소속 24개 사업장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국회에 모여 증언대회를 열었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 후 1년만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노동공약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켜진 게 없습니다. 공짜 야근, 과로사법, 최저임금 강탈법도 모자라 ILO(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 비준을 핑계로 경총의 청부입법인 ‘식물노조법’을 추진하고 있어요.”

대리운전기사, 영화 스태프, 세브란스 청소노동자, 현대그린푸드 식당노동자, 거제·통영 조선소 하청노동자, SK브로드밴드 설치노동자, 코레일네트웍스 서비스 노동자. 이날 증언대회 참석자들은 우리 사회의 가로등지기라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해고 위협과 임금 삭감 압박을 견디며 만든 노조들이 늘어나면서 민주노총 100만 조합원 중 비정규직은 30만명을 넘어섰다. 문 대통령이 2017년 5월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하고 2년 연속 두 자릿수 최저임금 인상이 이뤄질 때만 해도 이들에게 노동존중 사회가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초부터 경기침체에 고용대란설이 겹치면서 ‘시뻘건 얼굴을 한 신사’의 목소리가 정부와 여당, 청와대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3000가구가 넘는 우편·택배 물량을 혼자 감당하던 집배원이 뇌출혈로 쓰러지는 등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에도 산재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나오는 얘기는 온통 경제위기뿐이다. 정부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양이 장미꽃을 먹어치울 줄 모른다는 어린 왕자의 걱정보다는 시뻘건 얼굴을 한 신사가 하는 ‘중요한 일’에 더 신경을 쓴다.

소설가 이외수는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떠야 한다고 했다. 이 작가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경제가 죽었다’는 얘기를 72년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경제력 10위권 국가가 된 지금 과연 우리는 행복해졌냐”고 반문했다. 그는 “내 눈보다 자식 눈에 고추가 들어갔을 때 더 안타까운 것이 마음의 눈이고 이 눈을 떠야 진실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들려준 마지막 비밀도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것이었다.

청년 노동자 백민홍씨(33)는 두 해 연속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된 후 가장 큰 변화에 대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아, 나도 국가로부터 배려를 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백씨는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후 안산지역 공장을 거쳐 PC방, 편의점 등 수많은 일터를 최저임금으로 버텨내면서도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

그는 “2017년까지는 최저임금으로 고시원 방값과 식비·교통비 등 고정 지출비를 빼고 나면 20여만원밖에 남지 않아 아파도 병원에 가기가 두려웠지만 지금은 후배들에게 가끔씩 밥도 사주고 올 2월에는 처음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월세방으로 이사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그동안 마음만 있었는데 나도 주변 사람들과 작지만 나누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정부와 여당이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매월 고용동향이나 경기지표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들이다. 어린 왕자가 떠나온 별에는 불을 뿜는 두 개의 화산과 불이 꺼져 있는 하나의 화산이 있었다. 불을 뿜는 화산은 아침밥을 데우는 데 사용하지만 불 꺼진 화산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되돌아보도록 한다. 노동존중 정부가 2년 만에 길을 잃고 불시착한 이유는 밥을 데우거나 계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아는 관료와 전문가들이 노동정책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이 더 이상 장미꽃을 먹지 않게 하려면 2년 전 인천공항에서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하던 그때의 초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kangjk@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