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는 한 작가가 한국 현대사의 상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 작가는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또 한 번 적극적 대응을 선보였다. 그 밖에도 서울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권력과 구조의 폭력에 꾸준히 글로써 대응해 왔다.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회도 한 작가의 작품들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려는 “증언 문학”이라고 평가했다. 스웨덴 한림원도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을 선정 이유로 들었다. 경향신문 사설도 “죽음·폭력 등 역사 속 인간의 문제를 시적 문체로 풀어낸 그의 작품 세계가 단순히 한국 사회만이 아닌 인류의 문제로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노벨 문학상은 소설적 기교나 문학적 역량만으로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다. 치열한 역사의식과 탄탄한 휴머니즘이 배어 있어야 가능하다. <소년이 온다> 이후 한 작가는 치열한 역사의식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고, 그의 모든 작품에는 탄탄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죽음들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라는 기자회견 거부의 변(辨)도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시민군이 진압된 후 일상으로 돌아간 도청에 전화를 걸어 ‘분수대에 물이 나오지 않아야 해요.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소년이 온다> 중에서)라고 호소한 한 여고생의 심정이었으리라.
한 작가의 휴머니즘을 과거 거대 담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노벨 문학상의 또 다른 주요 작품으로 거론된 <채식주의자>가 대표적이지만,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민족이나 계급, 민중의 의미로 역사를 보지 않는다. 가족주의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역사의식과 휴머니즘이 하나로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주의와 구조적 폭력 및 일상의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폭력을 행사하는 무지막지한 존재이면서도 한없이 연약한 존재로 묘사된다는 것은 한림원이 지적한 바와 같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폭력성은 집단주의 이데올로기나 구조, 일상의 권위주의에 의해 생겨나거나 강화되며, 이러한 폭력에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인간은 숭고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숭고는 친구나 동료와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 연대는 거대 담론으로 엮인 관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엮인 관계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한 작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것은 각인(各人)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하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로서 존엄하다는 점이다.
K팝, K드라마 등 K문화는 세계 곳곳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제 K문학은 노벨 문학상까지 받아 세계 문학의 정점에 우뚝 섰다. 그런데 ‘K정치’는 어떤가?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에 올라 여러 불이익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보수 단체의 이의 제기를 그대로 수용해 초·중·고교에서 <채식주의자>를 폐기하게 했다는 것도 이번에 밝혀졌다. 이것이 한국 문화·교육 정책의 수준이다.
게다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일상화되어 의회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고, 대통령 부인은 석·박사학위 표절 논란에 주가조작 혐의까지 받고 있다. 검찰은 권력에 충성하고, 여당은 대통령의 사당(私黨)처럼 움직인다. 한국 대중은 권력에 순종하지 않고 민주화를 이룩해 민주주의를 압축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K대중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때론 잘못된 선택으로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권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물론 정치계 자체가 그에 부응할 수준을 갖추지 못해 선택의 폭이 좁은 탓이 더 크다. K대중에게도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티핑 포인트가 필요하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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