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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그래 쑥국을 끓여야지, 외로운 사람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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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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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 간밤의 술로 깨어나지 않고 창호지에 달려온 아침이 눈부시다. 밖은 봄볕으로 가득 차고 댓돌 위에 그가 신고 온 고무신, 먼 어린 날을 더듬는다.” 창인가, 판소리인가. 노래하던 여자가, 촤악 들고 있던 부채를 펴 올렸다. 한숨 뱉어내듯 슬픔을 내지르듯 봄 타령이 터져 흘렀다. “그래, 쑥국을 끓여야지. 나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남녘 해남 땅이나 북녘 해주 땅 어디 어디 쑥을 캐고 있을 눈매 선한 얼굴을 떠올린다.”(봄날, 판소리밴드 ‘오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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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쑥국.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된장 향기처럼 넓고 얕게 퍼지는 후렴구가 한 십 년 내리 불렀던 것처럼 입에 붙었다. 그래, 쑥국을 끓여야지. 마음은 노래처럼 이미 검정고무신을 신고 어디 어디를 돌아다니며 쑥을 캐는 어린 날이 되었는데, 정작 앉아 있는 자리는 전주 동문사거리 협소한 카페 ‘야간비행’이었다. 전주 사람들이 그냥 ‘야비’라고 부르는 곳. 아이고. 그렇게 말 줄인 시간 어디다 쓸래요? 야비라니, 야비하잖아! 말장난을 하려다가 문득 멈췄다.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이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꺼진 것처럼 떠올라서였다. 여기는 일 년 육 개월 전에 왔던 곳이다. 노래하고 드럼 치고 베이스 치는 사람, 높은 의자에 걸터앉은 사람, 박수치는 술 취한 사람, 노란 조명등도 탁자까지 여전했다. 유일하게 변한 것은 생맥주 한 잔에 공짜 안주 엄마손 파이를 잘라먹으며 저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에게 같이 환호하고 춤을 췄던 우리 중의 한 사람이 이 지상을 떠나 없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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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라는 부제가 달린 <여자전>을 펴낸 김서령 선배와 우리는 2017년 9월3일 전주 독서대전에 ‘여자로 산다는 것: 여성주체의 기억과 쓰기’란 섹션에 초대되었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지방에서 세 명의 여자는 한옥 집 툇마루에서 가을꽃을 만지면서 아무렴, 한 여자가 한 세상이지, 여자들이 만든 음식과 여자들이 먹은 음식을 이야기했다. 하늘하늘 한복이나 삐뚤어진 교복을 걸친 젊은이들이 사진 찍는 전동성당을 눈부시게 바라봤고 오래된 전주사고와 경기전에 걸린 옛 왕의 영정을 봤다. 한 숟가락 뜰 때마다 눈이 커지면서 전주비빔밥을 먹었고 입천장을 데면서 전주콩나물국을 떠먹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야비 카페에서 가장 크게 웃고 노래한 사람이야말로 김서령 선배였는데.

같이 찍은 사진에서 분말처럼 흩어지게 만들어 죽은 이를 알려주는 영화기법처럼 홀연히. 이 봄날 여기 있는 이들을 만나게 엮은 사람이니 살아 있다면 같이 왔으리라. 쑥국을 끓여야지, 대목에선 쑥국, 도다리쑥국, 봄 쑥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으리라.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펴냈으니 음식 이야기만으로도 4월의 하루가 다 흘러갔으리라. 죽어 더 이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건 빈 자리처럼 엄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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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한 세상을 데리고 여자 여럿이 더 이상 음식을 만들 수 없는 피안으로 건너갔다. 서령 선배가 배추적을 부치다가, 허수경 시인이 귤을 까다가, 내 엄마가 섬망 중에 잔치국수를 외치다가 모두 나무 아래 회색분말로 묻혔다. 조팝꽃 천지, 벚꽃 난분분한 봄날 저녁, 야간비행에서 착륙한 한옥 집에는 짜 맞춘 꿈처럼 검정꽃고무신이 한 켤레 놓여 있었다. 너는 살아 있으니 어서 쑥을 캐러 가라는 것처럼 발에 딱 맞는 신을 신고 어젯밤 들은 노래를 찾아봤다. 2003년 박남준이 쓴 시 ‘봄날 생각’에 곡을 붙인 거였는데 노래가 되지 않은 구절은 이랬다. “살아 있었구나. 긴 겨울 푸른 꿈꾸며 묵은 밭둑이며 이 나라 들판마다 너, 살아 있었구나. 눈물겨운 것, 그 풋 봄 한 움큼 캐어 된장을 풀고 쑥국 끓여내면 아흐, 그 향내 나는 봄. 몸….”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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