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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일사일언] 미술관과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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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안소정·'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 저자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내고 있다. 일터인 까닭이다. 미술관에서 일하면 예술 작품만을 다룬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얼마 전에는 감자를 심었다. 웬 감자인가 싶겠지만, 내가 일하는 미술관에는 텃밭이 있다. 자투리땅을 밭으로 만들고 가꿀 이를 모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이 내가 맡은 여러 일 중 하나였다.

누가 오겠느냐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사람들이 앞다투어 모여들었다. 몇 년간 신나게 한 일이라, 올해부터 손을 놓으면서도 내심 밭일에 끼고 싶었다. 그래서 두 팔 걷고 감자 심기에 뛰어들었다.

먼저 씨감자를 확보한다. 귀하다는 강원도 수미감자 종을 일찌감치 구해 창고에 보관해뒀다. 겨우내 감자는 싹이 올라왔지만 괜찮다. 씨눈을 잘 셈한 뒤 반으로 갈라, 단면에 재를 묻히고 꼭꼭 심어주면 제 몫을 훌륭하게 할 테니까. 애·어른 할 것 없이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흙을 토닥이는 모습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뙤약볕 아래서 감자를 캐는 환한 얼굴을 보면 매일 물을 주는 수고로움쯤이야 어떠냐 싶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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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텃밭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는데, 꽤 많은 참가자가 농사가 끝난 뒤에도 미술관을 참새 방앗간처럼 드나든다는 거다. 봄비 맞고 자란 상추를 따러 왔다가 흙발로 전시관 문턱을 넘거나, 몇 해 뒤 훌쩍 커버린 아이 손을 잡고 교육 프로그램에 나타나기도 한다.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나중에는 깨달았다.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 있는 공간은 다시 찾고 싶어지는 법이란 걸.

텃밭에서 보던 반가운 얼굴을 작품 앞에서 마주하며 생각했다. 화려한 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어쩌면 사람들이 원하는 건 마음 쉬어 갈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올해 미술관 텃밭 농사도 풍년이길, 그래서 알알이 여문 감자들을 꼭 닮은 행복을 수확하길 바란다.

[안소정·'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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