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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매경포럼] 대통령은 왜 환경부 장관을 호출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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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며칠간 자욱한 미세먼지 막을 헤치고 출퇴근하면서 '이 먼지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세먼지 농도 단계별로 몇 명이 새로 병들고, 몇 명이 죽음에 이르며, 국민 수명이 얼마나 단축되는지 역학조사를 실시해서 이걸 교통사고 현황판처럼 실시간으로 알리면 어떨까. 그러면 정부가 좀 제대로 된 대책을 궁리하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오전 참모들과 차담회를 하면서 미세먼지 문제를 의논했다. 대선 때 미세먼지 30% 감축을 공약한 입장에서 곤혹스러울 것이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청와대를 찾은 것은 이날 오후였다. 미세먼지 보고가 아니라 대통령-경제인 대화 배석을 위해서였다. 이런 의문이 든다. 환경부 이슈 중 미세먼지만큼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대통령이 고민하는 문제가 몇 개나 될까. 이런 때 대통령이 환경부 장관을 찾지 않는다면 조 장관이 임기 중 대통령 보고를 할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조 장관으로부터 '2019년 업무보고'를 받았다. 매년 연말 하는 보고다. 그때 특단의 미세먼지 대책을 주문했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 부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업 부서에서 긴급 현안이 발생했는데 정기보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CEO가 담당 임원을 호출하지 않는 직장이 있다면 그런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해보고 싶다.

언론이 대통령 대면보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경제부총리 정도다. 김동연 전 부총리는 월 1회 정례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은 "적자국채 발행 건과 관련한 부총리의 월례보고 요청을 청와대가 잘랐다"고 주장했다. 청와대가 공개하는 대통령 일정에는 비공식 보고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장관들이 얼마나 자주 대통령 개별보고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기회가 있기는 한 것인가.

이 정부에서 '청와대 군림' 얘기가 나오는 것은 대통령이 장관을 만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대통령의 뜻이 청와대 비서진을 통해 장관에게 하달되는 구도에선 비서가 자연스럽게 장관 위에 서게 된다. 청와대 5급 행정관이 육군참모총장을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성 인사 원칙은 대통령이 육군참모총장에게 직접 설명하는게 자연스럽다. 청와대 문턱이 높고 높아져 지금은 5급 행정관이 그 일을 하게 된 모양이다.

분 단위로 공개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정을 보면 각 부처 국장급 관료들로부터 거의 매일 보고를 받고 있다. 이달 8일을 예로 들면 외교정책국장, 방위정책국장, 납치문제대책본부사무국장, 외무심의관, 외무성 구주국장, 재무성 국제국장, 농림수산심의관, 산업심의관 등 10여 명이 총리와 면담했다. 영국 방문을 하루 앞둔 날이어서 관련 실무자들이 주로 들어갔다. 이날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총리가 소화하는 일상 업무 중 다수가 현업 부처 실무자로부터 보고를 받는 일이다. 아베가 우리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내각관방을 크게 확대하면서 역할비대론이 나오기도 하지만 우리와 비교할 수준이 못된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권위적 대통령 문화' 청산을 약속했다. 주요 실천사항으로 꼽은 것이 광화문 대통령 시대 개막, 국민과 수시로 소통,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 분할, 권력기관의 정치적 독립이다. 광화문 대통령 공약은 얼마 전 포기 선언이 있었다. 취임 후 TV로 중계된 기자회견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을 포함해 세 차례뿐이다. 대통령 권력 분할을 위한 개헌 논의는 사실상 실종됐다. 이 정부 들어 검찰·경찰의 독립성이 강화됐다고 믿는 사람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대체로 너무 큰 약속들이다. 그에 앞서 장관과 공무원들을 만나는 게 어떨까. 장관도 대통령을 못 만나는 상황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말하면 공허한 얘기가 된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게 '자신감의 근거'를 묻는 질문이 무례 논란을 빚자 어느 방송사 앵커는 "지난 정부에서 (기자들이) 다소곳이 손 모으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자면 권위주의 정부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만한 질문이 논란이 되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지독하게 권위적으로 보였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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