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32곳이 뽑은 ‘2019년을 빛낼 책’
새롭게 재해석한 역사서들 풍성
파워라이터들, 신작 들고 귀환
노동·페미·혐오 등 현실 폭로하는
정치사회 담론 서적들도 눈길
해마다 출간되는 신간 도서의 수가 8만종을 넘어섰지만, 독자에게 가닿는 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끝을 모르는 출판계 불황 속에 독서 인구는 곤두박질쳤다. 책보다 훨씬 더 박진감 넘치고 유용하기까지 한 콘텐츠가 쏟아지고, 장시간 노동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짓눌린 시민들은 책을 펼칠 마음의 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그래도 새해 벽두는 책 읽기라는 결심이 어색하지 않은 때다. 경향신문은 국내 인문사회 출판사 32곳을 대상으로 2019년 출간 예정작을 설문했다. 상당수 책 제목이 가제이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이름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진다. 독자적 사유와 탐구가 돋보이는 책,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와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책, 쓴 사람의 고뇌와 만든 사람의 진심이 합쳐진 책들이다.
■ 지난 100년의 한국 통찰하는 역사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어느 때보다도 역사를 되짚는 책들이 가득하다. 한국역사연구회가 기획한 <3·1운동 100주년 총서>(휴머니스트)는 총 5권에 걸쳐 3·1운동이라는 역사를 조명한다. 민족운동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제강점기 정치와 권력, 공간과 사회경제, 사상과 문화의 다각적 틀을 채택하는 점이 특징이다. 국문학자 권보드래(고려대)는 <3·1운동의 문화사>(돌베개)에서 ‘1919년 3월1일 누가 무슨 일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그날을 촘촘하게 복원한다. 출판사 창비가 펴내는 <3·1운동 100주년 기획도서>에서는 촛불혁명의 눈으로 3·1운동을 재해석한다.
개항기와 식민지 시대의 생활사에 관해 각 분야 인문학자들이 서술하는 <한국 근현대 생활사 큰사전>(서해문집) 시리즈도 첫선을 보인다. 1차분만 100여권으로 구성된 시리즈는 뒷골목, 섹슈얼리티, 생로병사, 시장, 취미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룰 예정으로 사료와 문학작품, 사진 등 풍부한 볼거리를 가미한 교양서를 지향한다.
새로운 관점에서 현대사의 여러 국면을 돌아보는 저작들도 기대를 모은다. 역사학자 토드 헨리(UC 샌디에이고)의 <서울 동화하기>(산처럼)는 식민지 조선 경성에서 벌어진 신도 축제, 산업 박람회, 공중위생 캠페인 등을 중심으로 당시 경성 시민들의 다채로운 대응 전략과 일본의 통치를 분석한다.
재일조선인 학자 정영환(일본 메이지가쿠인대)은 <독립으로 가는 험난한 길>(푸른역사)에서 해방 후 5년간 재일조선인 운동사를 동아시아 지배구도의 재편이라는 관점하에서 서술한다. 역사 강사 심용환은 <나의 10년>(사계절)을 통해 1987년 체제에서 성장한 3040세대가 쓴 한국 현대사를 내놓는다. 철학자 김상봉(전남대)은 <함석헌의 씨알철학: 형이상학적 시도>(길)에서 서양 사상을 뛰어넘는 함석헌 사상 고유의 특질을 밝힌다.
■ 폭넓은 시야 갖게 해줄 인문교양서
긴 호흡으로 시대를 통찰하는 묵직한 ‘벽돌책’들도 독자들을 기다린다.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는 <민주와 애국>(돌베개)에서 내셔널리즘과 공공성을 키워드로 일본의 기원을 추적한다. ‘일본 전후 사상사의 대서사시’라는 수식에 빛나는 역작이다. 1000쪽 분량의 <이전 세계의 연대기>(글항아리)는 사막, 암반, 분지, 산맥 등 지질학의 눈으로 지구의 역사를 돌아본 책으로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각 권이 700쪽에 달하는 <마오쩌둥 1·2>(교양인)는 마오쩌둥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연구서라는 평을 받은 책이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와다 하루키의 신작 <러일전쟁사>(한길사), 글로벌 히스토리 분야 권위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19세기사>도 번역 출간된다.
이름만으로도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국내외 파워라이터들도 신작을 들고 귀환한다. <총균쇠>의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대변동>(김영사)으로 성공한 국가들이 위기를 극복해온 과정을 보여주며 ‘문명사 3부작’을 끝맺는다. <마음의 미래>로 알려진 이론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인류의 미래>에서 화성 거주 프로젝트와 성간 여행 등 지구 밖에서 살아갈 인류의 운명을 돌아본다. <노동의 배신>을 쓴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Natural Causes>(원제·부키)에서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생애를 돌아본다.
국내에서는 진중권이 전 4권으로 짜일 <철학 오디세이>(휴머니스트)의 ‘고대’ 편으로 시동을 건다. 진중권은 <다섯 가지 감각의 역사>(창비)에서 ‘오감’에 입각해 미학과 예술의 역사를 살피는 작업도 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도 예고되어 있다. 강신주는 <길들지 않을 지혜>(오월의봄)에서 파리코뮌부터 촛불집회까지의 역사를 진보적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정리한다.
■ 당대 현실 꿰뚫는 정치사회서
노동, 재난, 장애, 혐오 등 우리 사회가 마주한 여러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책들도 시선을 붙잡는다. 은유 작가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에서 비정규직 청년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직접 찾아가 ‘노동하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사회역학자 김승섭과 박주영은 <해고와 건강>에서 해고와 실업이 노동자와 그들 가족의 건강을 위협하는 양상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사회학자 김찬호는 <유머니즘>(문학과지성사)에서 병적 웃음이 판치는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청년팔이 사회>(오월의봄)는 청년에 편향된 한국 세대 담론을 비판한다.
외국 서적이지만 ‘지금 여기’ 한국에서도 유효한 화두를 던지는 책들도 나올 예정이다. ‘졸모’(엄마 노릇을 졸업한다는 뜻)를 주창한 인기 만화가 사이바라 리에코의 <졸모 선언>(책세상)은 독박육아, 조부모의 아이 돌봄 등 일본과 여러모로 닮은꼴인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GM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한 <제인스빌 이야기>(세종서적)는 최근 군산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게 한다. <몬산토 세계 시민 법정>(시대의창)은 인체와 환경에 유해한 고엽제 등을 팔아온 다국적기업 몬산토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싸움을 기록한 책으로, ‘에코사이드’(생태학살)의 실태를 폭로한다. 가이 스탠딩의 <자본주의의 부패>(여문책)는 불로소득자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촉진할 새로운 소득분배 체계를 제안한다. 역사가 애덤 투즈의 <붕괴>(아카넷)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세계사적 변화를 정밀하게 파고든다.
■ 참신한 주제 담은 과학서와 페미니즘 책
어느덧 서점가에서 확고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과학과 페미니즘 분야 신간들도 빼놓을 수 없다. 해리 콜린스의 <중력의 키스>(글항아리)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중력파 연구의 50년 역사를 지켜본 과학사회학자의 남다른 통찰이 담긴 역작으로, 지식이 아닌 활동으로서의 과학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수십년간 새들의 생태를 연구해온 리처드 프럼이 쓴 <아름다움의 진화>(동아시아)는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의 오래된 관념을 뒤집어 환경에 적응한 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가 살아남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신경과학자 올리버 색스의 미발표 에세이를 모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알마)은 4월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출간된다.
페미니즘 도서들은 독자들을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최신 논의들로 안내한다. 노르웨이 여성 의학자들이 쓴 <질의 기쁨>(열린책들)은 신비화된 여성 생식기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고, <흔들리는 가슴>(아르테)은 여성의 가슴에 얽힌 정치학을 드러내 보인다. 페미니스트 생물학자 앤 파우스토 스털링은 <섹싱 더 바디>(후마니타스)에서 섹스와 젠더의 해묵은 이분법을 ‘간성인’이라는 존재를 통해 돌파하려고 시도한다. 열성적인 성평등 옹호론자인 남성 저자가 쓴 <왜 남자는 성평등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바다출판사)는 양성평등의 당위성과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포용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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