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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태평로] 高宗의 세 가지 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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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 오판하고 국가보다 皇室 이익 앞세우며 제 편·남 가르는 '진영 정치' 앞장

낭만적 고종觀은 역사 誤導

조선일보

김기철 논설위원


지금 덕수궁엔 1905년 9월 조선을 찾은 미국 고위급 사절단에게 준 고종 사진이 전시돼 있다. 지난달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전(展)을 위해 113년 만에 돌아온 유물이다. 고종은 황룡포에 보라색 익선관을 쓴 황제 차림이다. 황실 사진가 김규진이 촬영한 이 사진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맏딸인 앨리스와 함께 온 기업인 에드워드 해리먼이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빌려왔다. 고종은 당시 러일전쟁 강화를 중재한 미국 도움을 기대하며 스물한 살 앨리스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성대한 오찬을 베풀고 황실 가마로 모셨다. 떠나는 앨리스 일행에겐 고급 피나무 함에 담아 사진을 선물로 줬다. 황제가 다스리는 독립국 대한제국을 기억해달라는 취지였다.

앨리스는 냉정했다.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앨리스의 평가는 대한제국을 향한 외부의 시각을 솔직하게 담은 것이다. 고종이 '미국 공주'에게 매달렸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난 뒤였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친(親)러시아 정책은 영국·미국 등 대서양 세력의 경계심을 촉발했다. 이 틈을 탄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전쟁 승리의 포석을 깔았다. 앨리스 방한 2주 전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쓸 만큼 대한제국을 불신했다. 고종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루스벨트 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릴 만큼 국제 정세에 무지했다.

고종은 청일전쟁 때는 미국 공사관, 러일전쟁 때는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다.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에 구출됐고 을미사변 후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러일전쟁 직전 중국 칭다오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틈만 나면 외국 공사관 피신·망명설(說)이 도는 국가 지도자를 어느 나라가 제대로 인정해줄까.

고종은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다. 그의 재위 44년은 한·중·일 삼국이 생존(生存)을 위한 필사의 근대화 경주(競走)를 벌이던 때였다. 하지만 국가 개혁을 서두르기보다 군주의 위신을 앞세우며 예산을 탕진했고 갑신정변·동학혁명 같은 고비마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러일전쟁 때는 중립국 선언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휴지 조각이 됐다.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는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은 세계의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고종이 국력을 모아 헌법과 의회, 근대적 사법체제를 마련하고 나라 살림을 키워 근대 문명 국가로 전환했다면 그토록 무력하게 식민지 신세로 추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국가 개조를 위해 손잡아야 할 우호 세력인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탄압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가 군주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힘을 합해도 벅찬 시기에 고종은 철저히 자기편과 남을 가르는 진영(陣營)정치의 선두에 섰다.

고종이 각국에 밀사를 보내 일본의 주권 침탈을 폭로하는 비밀 외교를 펼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약육강식 시대에 힘없는 나라를 도와줄 선의의 이웃은 없었다. 최근 드라마와 연극, 전시로 고종에게 '개혁' '항일' 코드를 입히는 재조명 열기는 사실을 오도할 위험이 크다.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간 길을 근대 국가를 꿈꾼 '고종의 길'로 미화한다고 해서 망국으로 이끈 죄(罪)는 줄지 않는다. 35년간의 일제(日帝) 지배를 부른 1차적 책임은 고종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김기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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