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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강제징용 역사는 한반도 전체의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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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39~45년 350만명 이상 피해 추정

초기는 형식적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강제

열악한 노동환경에 목숨 잃은 경우 부지기수

일본 패전 뒤 조선인 노동자들은 방치

한국 정부도 오랫동안 피해 보상 소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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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천에 살던 이천구씨는 17살 때인 1942년 일본 후쿠오카현 야하타제철소에 끌려갔다. 어느 날 면사무소 호적계 직원과 순사(경찰)가 찾아왔다. “면서기가 ‘너 이제 징용에 징발됐다’고 말하더라고. 뭐, 도망가면 부모들이 고통을 당하니까. 별수 없거든. 그 당시에는.” 그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암모니아 비료를 생산하는 곳에서 일했는데, 식사는 밥 약간과 미소시루(일본식 된장국) 반 공기, 단무지 2쪽, 콩조림 1~2개가 전부였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던 그는 1943년 제철소를 탈출해 와카마쓰에 있던 철물 공장 이마무라 제작소에서 잡부로 일했다. 일본이 패전한 뒤인 1945년 9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갔지만 배표를 구할 수 없었다. 시모노세키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몰려들었고, 하루에도 몇십 명이 전염병 등으로 죽어나갔다. 그는 주검 치우는 일을 하면 배표를 빨리 준다는 말에 열흘간 주검 치우는 일을 하고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이씨의 체험은 2006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강제동원 진상규명위)가 발간한 구술 기록집 <똑딱선 타고 오다가 바다 귀신 될 뻔했네>에 나오는 얘기다.

대법원이 30일 손해배상 판결을 내놓은 강제징용 피해 기간은 보통 1939년부터 1945년까지로 본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강제징용의 토대를 마련했다. 초기에는 겉으로나마 ‘모집’ 형태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각종 강제와 강압적 방법을 사용했다. 유제철씨는 200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위 조사 때 처음에는 징용을 피해서 도망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면장이 아들을 찾아내라며 아버지를 구타하는 바람에 규슈 제련소로 끌려갔다. 일본 기업이 조선총독부 허가를 받은 뒤 경찰이나 면장 같은 조선 내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농촌 지역의 힘없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 곧잘 사용됐다. 총독부가 몇 명을 뽑아서 어떤 기업에 인계하라고 할당하면 지역 말단 행정기관이 직접 할당량을 채우는 방식도 사용됐다.

1944년 9월부터는 처음부터 대상을 특정해 징용 영장을 발부하는 방식인 강제 노무징용 방식도 사용됐다. 강제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은 약 200만명으로 추정된다. 해방 당시 조선의 인구가 2500만명가량이었으니 강제징용 피해는 조선 전체에 걸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강제징용된 이들이 혹독한 노동환경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로 사망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942년 야마구치현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로 조선인 136명이 떼죽음당했다. 노동환경이 가혹했던 조세이탄광은 조선인 강제동원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고 박경식씨가 쓴 책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1965년)에는 아키타현 오사리자와 광산에서 숨진 조선인 4명의 사인이 나온다. 2명은 배가 고파서 아무 풀이나 뜯어먹다가 독미나리 중독으로 숨졌고, 한 사람은 혀를 깨물었으며, 2명은 두개골 골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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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뒤에도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패전 뒤 조선인 귀국 수단 마련에 적극 나서지 않았고, 악천후 속에서 ‘야미선’이라고 불리던 작은 목선에 몸을 실었다가 태풍을 만나 귀향의 꿈과 함께 가라앉은 이들이 많았다. 히로시마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했던 강제징용자 240여명도 귀국길에 올랐다가 실종됐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은 태풍을 만나 그렇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들 대부분은 식민지에서도 힘없고 가난한 농촌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이었다.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는 패전 뒤 미군정의 재벌 해체 정책 뒤에도 살아남아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악명 높았던 아소광업이 전신인 아소그룹은 지금도 후쿠오카 곳곳에 광고를 내거는 유력 기업이다. 이곳에서 조선인들은 폭행에 시달리며 길게는 하루 17시간을 일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갱 밖에 나오지 못하고 했고 탈출을 막기 위해서 숙소 주변에 3m 판자벽을 둘러쳤다. 생존자들은 배가 고파서 간식을 사먹고 나면 돈이 없을 정도로 임금이 적었다고 회상한다. 총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부총리 겸 재무상으로 있는 아소 다로의 증조부가 아소광업의 설립자다.

한국 정부도 피해 회복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인 한-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5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경제협력 자금을 제공”하고 “양국은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일본과 합의했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을 근거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할 권리뿐 아니라 피해자 개인이 일본 기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도 소멸했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부도 기본적으로 일본의 이런 주장을 오랫동안 거부하지 않았다. 개인 청구권이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단은 해방 67년 뒤인 2012년에야 나왔다. 당시 대법원은 “손해배상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한 보상도 부족했다. 1975~77년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사망자 8552명에게 30만원씩 25억6500여만원을 줬다. 이어 2007년 군인·군속 공탁금 10만8900여건(총액 9100만엔), 2010년 노무자 공탁금 6만4200여건(총액 3500만엔)의 명단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 한국 정부 재정으로 피해자들에게 1엔당 2000원으로 환산한 위로금 수십만~수백만원씩을 지급했다. 그나마 이를 받은 이들도 일부에 그친다. 강제동원 진상 조사도 고 박경식씨를 비롯한 재일조선인들과 일본 시민단체들이 주로 해왔다. 한국 정부 차원의 본격 조사는 2004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위가 발족하면서 이뤄졌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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