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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6 (수)

“시가 천지삐까리다” 칠곡 할머니들 …‘오지게 재밌는’ 뮤지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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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라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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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가까이 김치 담그고 손주 본 손인데 와 이리 벌벌 떨리노.”



여기는 팔복리 문해학교. 한글 받아쓰기를 하는 할머니들이 긴장감을 없애려 유쾌하게 웃었다. 받아쓰기는 시작일 뿐, 이제 막 한글 걸음마를 뗀 할머니들에게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나 나올 법한 임무가 떨어진다. 바로 ‘시’를 쓰라는 것.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데 시를 우째 쓰노!”



영화 같은 일이 아니라 실제다.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의 사연을 담은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2019)은 개봉 당시 4만여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관객들이 함께 울고 웃었던 칠곡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뮤지컬로 탄생했다. 지난 11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27일까지)이다.



작품은 다큐멘터리와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원작으로 약간의 각색을 더했다. 칠곡이란 특정 지역 대신 ‘팔복리’란 가상의 공간을 설정했지만, 할머니들이 실제 쓴 시를 토대로 넘버를 만드는 등 최대한 원작의 감동을 살렸다. 지난 1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오경택 연출은 “연출할 때 가장 어려운 의뢰가 남녀노소 모두가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럴 수 있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인간의 삶이 담겨 있는 할머니들의 시를 보면서 이 작품은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모두가 건강하고 편안하게 웃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서울에서 팔복리 할머니를 취재하러 온 프로듀서 지석구(강정우·김지철)와 문해학교 선생님 이가을(하은주)과 할머니 이영란(구옥분·김아영), 양춘심(박채원), 김인순(허순미), 이분한(강하나·이예지)의 갈등과 우정, 사랑을 코믹하게 그리며 웃음을 자아낸다. 한글 공부보다 소주 마시는 걸 좋아하는 할머니들이 주사를 부리다가 갑자기 록 사운드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하기 시작하면 박수가 절로 나온다.



노년의 삶을 그리는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다. 배우들이 문해학교로 가 할머니들을 보면서 연기를 연구했다고 한다. 춘심 역의 배우 박채원은 “극본만 보다가 실제 할머니들을 보자 저절로 무릎을 탁 치게 됐다.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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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라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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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웃기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한글을 배우게 된 사연 하나하나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분한 할머니의 이름에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죄악시돼 교육은 꿈도 못 꾸던 과거 농촌의 아픔이 배어 있다. 영란 할머니는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는 6살 손주가 무섭고, 그런 자신이 창피하다.



이런 아픔이 있는 할머니들이 쓴 시는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극의 클라이맥스가 시 낭송 대회인 이유다. “가마이 보니까 시가/ 참 만타/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영화 속 실존 인물 박금분 할머니의 ‘시’를 토대로 한 넘버 ‘우리는 가시나’가 울려 퍼지면 극장은 감동으로 가득 찬다. 12일엔 원작 다큐에 출연한 안윤선 할머니와 주석희 선생님도 직접 공연을 관람했다.



제작사 라이브의 강병원 프로듀서는 “원작 영화를 보면서 할머니들의 모습을 많은 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뮤지컬을 만들기로 결심했다”며 “무언가 배우고 삶을 즐겁게 사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20~30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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