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과 있을 때 세상 가진 느낌"
지원자 없어…산악부 동아리 등록 실패
"북한산 인수봉 취나드A(암벽등반로)를 철수형(산악부 선배)과 둘이서 올랐다. 40m 직벽 크랙(바위 틈새)에서 장비 부족과 체력 소모로 형이 순식간에 20m 정도 슬립(미끄러짐)을 먹었다. 동료가 슬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당황했다. 몸에 균형이 안 잡혀 오르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형이 그렇게 많이 떨어졌는데 가장 큰 이유는 빌레이를 보았던 나의 탓이다. 많은 반성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김창호의 ‘산행일지’ 1988년 11월 13일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암벽훈련을 하면서 느낀 당혹감이 생생하다.
"우리 맑은 얼굴을 가진 사랑스런 후배들과 조그만 배낭을 매고 있을 때 온 세상을 가진 듯한 느낌이다. 힘들고 마음의 갈등을 느낄지라도 한해 동안 잘 다닐 수 있으리라 믿는다. 93학번 기쁜 아가들아! 난 너희들을 믿고 싶다." (93년 ‘산행일지’)
히말라야의 외진 산에서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17일 돌아온 고(故) 김창호(49) 대장.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작했느냐"고.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이 서울시립대 산악부 지하창고에서 발견한 김창호의 ‘산행일지’에는 ‘전무후무한 산악인 김창호’가 어떻게 산에서 자신을 단련해 나갔는지가 소상히 적혀있었다. 김창호 대장은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무(無)산소, 무(無)동력으로 완등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부원들을 소개하는 페이지. 김창호 대장은 ‘행정’을 맡았다고 적혀 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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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장이 서울시립대 산악부에 입부한 것은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이었다. 당시 김 대장은 ‘보라색 추리닝(트레이닝복)’을 즐겨 입었다고 선후배들은 기억했다. 산악부 창고에는 김 대장이 산행 이후 부원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이 남아 있다. 사진 속에서 김 대장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멋쩍게 웃고 있다. 그 옆에는 "야! 나도 노래 하나 불러야것다"라고 쓰여 있다.
김창호 대장이 1993년 작성한 산행일지. /서울시립대 산악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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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장은 산행일지에 이렇게 썼다. "암벽에서 춤을 춘 지도, 굉장한 세월이 흘렀다.
의구심을 가지며 손에 초크(식용탄산마그네슘과 송진가루를 섞은 것)를 만졌다. 역시나. (산이) 쉽게 보내주지 않아 추락…." "후배들의 눈이 나의 모습 하나하나 보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부드러운 동작으로 해결해 암벽에 발을 걸었다." 그는 이렇게 한발 한발 산으로 다가갔다.
김 대장은 등산을 두고 "스스로 선택한 길. 절망의 벼랑 끝에 매달려 부르는 희망의 노래"라고 했다. 김 대장을 산으로 이끈 서울시립대 산악부는 지금 ‘벼랑’에 몰려있다. 산악부에 지원하는 신입생이 적어 올해 정식 동아리 등록에 실패한 것이다. 1961년 설립된 전통 있는 시립대 산악부 역사도 잠시 멈췄다.
그래도 ‘희망의 노래’는 계속된다. 마지막 남은 시립대 산악부원들은 여전히 산을 오르고 있다. "3~4명 정도가 남아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정식 동아리 등록 안 되면 어떻습니까. 신경 안 씁니다. 창호형이 낸 ‘새로운 길’을 따라 걷는데요."
(위에서 시계방향으로)김창호 대장이 암벽등반장에서 스위스칼을 물고 있다. 1993년 5월 2일, 등반연습 중인 김창호 대장. 5월 1일 도봉산 포대능선 등반 중 찍힌 김창호 대장. 그는 대학 시절 보라색 트레이닝복을 즐겨 입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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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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