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
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 깊숙이 관여 후
일본 내에 한일관계 정상화 중요성 알려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 주장하기도
74년간 ‘평생 기자’ 일관 후 98세로 타계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지난해 3월 윤석열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1면부터 총 9개 면에 걸쳐서 보도했습니다. 당시 윤 대통령이 3 · 1절 기념사를 통해 조건 없는 한일 관계 개선을 언급하고, 징용 문제를 한국이 먼저 책임지고 배상하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자 파격적인 편집과 보도로 호응한 겁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여론을 바꾸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9일 타계한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 주필은 1960년대 당시 차기 총리로 거론되던 자민당의 거물 오노 반보쿠 부총재의 양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신임을 받았다. 와타나베는 그의 방한을 성사시켜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게 했다. 사진은 와타나베(맨 오른쪽)가 1960년대 오노 부총재를 취재하고 있는 모습/요미우리 신문 2024년 12월 20일자 |
올해 5월 개최된 제주포럼에 박철희 당시 국립외교원장(현 주일대사)과 함께 발표자로 나온 모리 다케오(森健良) 전 외무성 차관이 “윤 대통령의 (한일 관계 정상화) 결단에 대해 존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가 됐습니다.
2018년 대법원의 일제 징용 배상 판결, 2019년 아베 내각의 경제 제재로 양국 관계자들이 악수조차 하지 않았던 시기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입니다. 요미우리의 ‘초대형 9개면 인터뷰’가 일본 사회의 변화를 견인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상화 된 한일관계가 윤 대통령의 어이없는 12·3 자폭계엄으로 다시 흔들릴 가능성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이 이처럼 대규모의 지면을 할애한 배경에는 ‘일본의 마지막 괴물’ ,’막후의 쇼군(최고 실력자)’으로 불려오다가 19일 별세한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98) 대표 겸 주필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요미우리를 움직였던 실세 와타나베 주필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와타나베는 1995년 아사히신문이 2002년 한 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주장하고 나서자 “공동 개최한다면 양국 모두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며 이를 지지하고 나서는 등 한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기원해왔습니다.
◇ 자민당 실력자 방한 성사시키고, 김종필-오히라 메모 특종
와타나베는 기자이면서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특이한 인물입니다. 와타나베는 1960년대 차기 총리로 거론되던 자민당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부총재의 양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노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와타나베는 2020년 자신의 일생을 다룬 NHK 다큐멘터리에서 “오노 부총재는 한국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어서 이전부터 한국을 싫어했었다”고 했습니다.
1962 년 한국 정부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던 와타나베가 그런 오노를 설득했습니다. 그는 “오노와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게 해줬더니 얘기가 잘 통해서 서로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오노가 방한 결단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오노는 1962년 11월 방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한일 국교 정상화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와타나베가 한일 수교 조건을 기록한 역사적인 메모를 입수한 것은 1962년 서울 방문 때였습니다. “오히라-김종필 합의 문서는 김종필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무상 원조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1억달러라고 쓰인 문서를 그가 보여줬다. 3 · 2 · 1…. 배상 금액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요미우리는 와타나베가 김종필 부장으로부터 취재한 내용을 1962년 12월 1면 톱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와타나베는 자민당 거물의 방한을 성사시키고 이를 1면 톱 특종 기사로 쓴 데 이어 ‘JP-오히라’ 메모를 다시 단독 보도해 한일 양국을 모두 흔들어 놓았습니다. 김종필에 대해선 “두뇌가 우수했다. 인격도 좋고…. 재팬(일본) 콤플렉스도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주필이 2020년 NHK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고 있다. 와타나베 주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대해 "서울 방문 당시 김종필로부터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NH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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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NHK 다큐멘터리에서 1960년대 자신의 역할이 기자로서 의 선을 넘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전례 없는 것이지만 양국 간 국교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국교 정상화가 양국 모두에 플러스가 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기자 중에 니시야마 다키치(西山太吉) 전 마이니치신문 기자가 있습니다. 니시야마는 일본의 유명 소설가 야마자키 토요코의 작품 ‘운명의 사람’ 실제 모델입니다. (니시야마는 1971년 미일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원상복구 비용 약 4000만엔을 일본이 부담키로 한 밀약을 특종했으나, 외무성 여자 직원과의 불륜을 통해 이를 취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니시야마는 “와타나베가 오노 부총재의 방한을 기획하고 동행자의 명단까지 만든 것은 물론 섭외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 요미우리 6개면에 걸쳐서 와타나베 추도
요미우리는 와타나베가 타계하자 20일자 1면 사이드 톱에 이어서 정치, 경제,스포츠면 등 총 6개 면을 할애해서 그를 추도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와타나베는 지난달 말까지도 정기적으로 출근, 임원 회의에 참석했으나 이달 들어 갑자기 입원했습니다. 요미우리는 그가 “숨지기 며칠 전에도 (병상에서) 사설을 점검하면서 마지막까지 주필로 집무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고에는 “평생 기자로 일관했다”는 제목이 달렸습니다.
와타나베는 NHK가 다큐멘터리에서 “와타나베의 주장과 행동이 헤이세이(平成·아키히토 천황 재임시기 1989~2019) 시대에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할 정도로 막후에서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거물로 평가돼 왔습니다. 일본 정계에서 ‘나베쓰네’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그는 도쿄대 시절에는 공산당 지부 책임자였지만,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것에 반발해 전향했습니다. 1950년 요미우리에 입사 후 워싱턴지국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장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1991년 사장이 되자 일본 사회 우경화에 맞춰 보수적 색채가 강한 지면과 공격적 경영으로 신문 부수를 늘려왔습니다. 그의 사장 재임 중 요미우리는 1994년에 최초로 1000만부를 돌파했습니다. 2001년 1월에는 1031만 91부 발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1996년부터 약 8년 동안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로 활동하면서 스포츠 분야로도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 ‘검증 전쟁 책임’ 기획으로 일제 군국주의 비판
그는 일제 군국주의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요미우리는 2005년부터 1년간 ‘검증(檢證) 전쟁 책임’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했는데, “군국주의자들이 수백만 명을 죽여 일본을 폐허로 만들었다. 젊은이들에게 전쟁 책임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회고했습니다.
1945년 패전 이후에 군국주의자를 엄격하게 처벌했어야 일본 정치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친한 관계를 맺었던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는 모두 전쟁에 반대했었다고도 했습니다. 또, 1983년 다나카 가쿠에이와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연합해 나카소네가 총리가 된 배경에도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둘 다 젊은 시절 군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을 겪으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했기에 나카소네가 지원을 요청하고 100여 명의 의원을 거느리고 있던 다나카가 그를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요미우리 신문은 20일 와타나베 쓰네오 주필의 별세를 1면 사이드톱에 이어서 정치, 경제, 스포츠 면 등 총 6개면에 걸쳐서 다뤘다. 그만큼 그는 일본 사회를 막후에서 움직이는 실력자였다. /요미우리 2024년 12월 2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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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을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반대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선 “역사도 철학도 모르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교양도 없다”고 맹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94년 자위력 유지와 환경권 신설, 헌법재판소 창설 등을 명기한 헌법 개정 시안을 만들어 개헌을 주장했습니다.
와타나베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정언(政言) 유착의 대표적 기자이나 그의 활약은 독보적입니다. 그는 일본 정계의 유력 정치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총리와 내각 인선 및 주요 정책에 개입해왔습니다. 이와 관련 요미우리는 19일 “(와타나베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아베 신조, 기시다 후미오 등 역대 총리들과 친분이 두터워 정치권은 물론 각 방면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20일에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가 그에 대해 “정치가를 움직여서 정국을 움직여가는 신문기자”라고 평가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특히 존 F 케네디가 미 대통령이 된 과정을 연구하며 나카소네 총리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그의 묘비에 새겨질 문구는 나카소네가 써 줄 정도로 평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베 신조가 2012년부터 8년간 총리로 집권할 때는 ‘언제든 총리와 통화가 가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화제가 된 NHK 다큐멘터리
1926년생인 와타나베가 2020년 NHK 다큐멘터리에서 전성기 못지않은 기억력과 논리력으로 쇼와(昭和), 헤이세이(平成) 시대 정치에 대해 회고하는 모습은 많은 일본인을 놀라게 했습니다. 와타나베는 당시 일본 정치의 이면(裏面)에 대해서도 비화를 털어놓았습니다. 요미우리 라이벌인 아사히는 1회가 방송된 후 “와타나베 주필의 마음 좋은 할아버지 같은 모습은 독재자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것”이라며 “다음 방송도 꼭 보고 싶다”는 평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1950년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당시 일본 정계에서 돈이 자주 오갔다고 회고했습니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가 될 때 전당대회장 복도에서 의원들이 돈을 주고받은 것을 목격한 그는 “마치 성관계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한 이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무상이었습니다. 그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가 대장성(大藏省) 대신일 때 비서관을 지낼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라가 정치적으로 성장, 주목받기 시작하자 이케다가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히라 외상이 내게 ‘이케다 총리가 나를 싫어한다. 넘버 원은 넘버 투를 싫어한다. 그것은 질투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라고 믿었는데… 정치는 미묘하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유능한 정치부 기자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인이 불우할 때 정성을 들여서 각별한 관계를 맺고,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권력투쟁 일삼으며 종신 독재자 됐다”
일본 사회에는 그의 지나친 권력 지향성을 지적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요미우리 내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와타나베 왕국’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일본에서 요미우리는 디지털화에 뒤처진 신문으로 통하는 데 그 배경으로 ‘페이퍼 신문’에 집착하는 와타나베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전횡(專橫)의 카리스마 와타나베 쓰네오’라는 책을 출간한 저널리스트 오시타 에이지(大下英治)는 그가 사내 권력 투쟁을 일삼으며 대표 자리에 오른 후 ‘종신 독재자’가 됐다고 비판했습니다.
P.S.
1. 2020년 도쿄특파원 시절, NHK가 와타나베 다큐멘터리를 방연한 후 그를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1960년대 한일 수교 과정에 대해 말하지 않은 부분이 더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언론의 관계는 영원한 숙제인데,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언론관에 대해서도 직접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요로를 통해서 와타나베 인터뷰를 타진했습니다. 당시 제게 돌아온 답신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서 고령의 와타나베 주필이 외부 인사를 만날 수 없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쿄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2021년 4월 귀국 후에도 여러 차례 와타나베 인터뷰를 계속 타진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쉽습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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