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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세상 읽기] ‘모방국가’의 종말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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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원재
LAB2050 대표


“한국에서 정말 많이들 배우러 오십니다.” 스페인 발표자가 웃는 얼굴로 입을 뗐다.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 빌바오에 도착했다. 그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옆 강가를 걷고 또 걸었다. 제조업 몰락 이후 옛 조선소 터, 철도 부지가 미술관과 공원으로 변모한 아름다운 강가다.

‘빌바오 모델’은 전세계에 탈산업도시 전환의 모범적 사례로 알려졌다. 많은 이가 ‘배우겠다’며 찾아갔다. 수많은 한국인이 거기에 포함된다. 건축가들은 구겐하임 미술관과 도시 미관을, 공무원들은 도시혁신 과정을, 사회적경제 및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협동조합과 시민참여 전통을 배우겠다며 그곳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빌바오는 완벽한 성공 모델일까? 여러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구겐하임은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었을까? 아름다운 강가를 살짝 비껴가 걷다 보면, 곧 빈민가가 나타난다. 빌바오의 빈곤인구는 2000년 이래 33%가 늘었다. 잘나가던 산업도시 시대 공장 노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빌바오의 실업률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15%에 육박한다. 일자리를 잃은 공장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 또는 불안정한 노동자로 여생을 살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곳의 협동조합은 한국이 똑같이 따라 하면 좋을 이상적인 모델일까? 스페인의 생활협동조합 에로스키는 전국에 매장을 1800개나 낸 대형마트다. 규모와 영향력은 키웠지만 유기농, 공정무역, 친환경 등의 가치는 선명하지 않다.

구겐하임과 관광산업이 경제문제를 완화하기는 했으나 해결하지는 못했다. 시민들에게는 자부심과 소득이 돌아왔지만, 모두에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은 세계적 성공을 거뒀지만, 순수하게 사회적 가치만을 주장하며 그랬던 것은 아니며 시장에서 기업으로서 경쟁하며 성장했다.

한국은 ‘모방국가’였다. 대기업 경영자들은 과거 일본 기업들을 방문해 도면을 몰래 촬영해 오거나, 공장 구조를 감쪽같이 메모해 와 한국에서 똑같이 만들어 성공했다는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스타트업을 키운다며 미국 실리콘밸리를 배워 똑같은 시스템을 한국에 만들려 하고, 핀테크를 한다며 중국 위챗페이와 알리페이를 배우러 나간다. 서구 민주주의를 배우며 민주화를 이뤘고, 유럽 복지국가를 따라 복지제도를 하나둘씩 도입했다. 모방이야말로 우리의 빠른 성공의 디엔에이(DNA)였다.

중요한 정책연구과제의 맨 앞단에는 ‘해외사례’가 빠짐없이 나온다. 정치인도 언론인도 스스럼없이 ‘외국에서는 이렇게 하는데’라는 말로 제안을 시작한다. 공공과제에서는 ‘선진지 견학’ 용어가 여전히 사용된다. 하지만 이제 따라 배울 곳이 없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함께 고민할 일들투성이다. 모방할 곳이 더 이상 없을 때, ‘모방국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방국가’의 유전자를 ‘실험하는 국가’로 바꿔야 한다. 모방하지 않으면, 창조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창조는 모방과 원리가 전혀 다르다. 모방은 실패하지 않아야 성공하는 것이지만, 창조는 실패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배워서 실행하려 하지 말고, 실행하면서 배워야 한다. 느려도 토론하고 협력하며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국제사회적경제포럼이 어쩌면 한 사례가 될 수도 있겠다. 서울시와 서울의 활동가들이 모여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국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머리를 맞댄 지 5년 만에, 84개국의 1700여명이 모였다. 아이디어를 낸 서울이 의장국이어서 포럼의 중심에 섰다.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아니라 고민하며 협력하는 곳이다.

우리는 정답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수많은 실험과 실패가 필요하다. 그래야 ‘한국 모델’도 가능하다. 불확실한 실험 과정을 겪어낼 용기를 내는 것, 그게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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