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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돌봄 끝내고 되찾은 자기 자신…날개 편 ‘할머니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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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출판시장서 돌풍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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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어떤 역할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날개를 쫙 펴고 싶지만 마음껏 펼 수 없고 접어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할머니는 요구받는 역할이 없고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살고 싶은 방향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나는 나를 따른다’는 할머니의 철학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일본의 와카타케 63세에 데뷔

최고령 아쿠타가와상 수상하고

100세 전후 ‘아라한 책’ 신조어도


일본 소설가 와카타케 지사코(64)가 말했다. 작가는 지난 8월 소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토마토)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작가 자신을 반영한 할머니 모모코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할머니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소설로, 홀로 남겨진 여성이 고독과 외로움 끝에 자유를 발견하는 과정을 그렸다. 남편과 사별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63세에 데뷔, 다음해에 역대 최고령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가 됐다.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 ‘노년의 삶’은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화두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해온 여성들이 황혼 이혼을 하거나 졸혼을 하고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나서는 일도 늘고 있다.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많아서였을까, 책은 일본에서 51만부가량 팔리며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다.

최근 출판시장에서 ‘할머니 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페미니스트이자 평화운동가인 오치아이 게이코(73)도 지난달 어머니를 홀로 간병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우는 법을 잊었다>(한길사)를 펴냈다. 소설의 주인공 후유코는 미혼모 어머니에게 태어났고,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정신을 배운다. 나이 들어 병든 어머니를 돌보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 소설 역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반영된 소설로, 작가가 21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그동안 집에서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작가는 최근 노년의 여성 작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유에 대해 “주업이 따로 있어 자기표현을 하고 싶어도 어려운 사람들이 작가로 활동하게 되는 시기가 50~70대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에선 ‘할머니 작가’들의 돌풍이 뜨겁다. 100세 전후 할머니들의 저서를 칭하는 ‘아라한(around hundred) 책’이라는 신조어가 있을 정도다. 2009년 시바타 도요(당시 98세)가 낸 첫 시집 <약해지지 마>는 150만부 넘게 팔렸고, 지난해 일본 연간 베스트셀러 1위엔 95세 여성 작가 사토 아이코가 쓴 <90세, 뭐가 경사라고>가 올랐다. 국내에서도 일본 작가 사노 요코가 말년에 암 진단을 받은 뒤 쓴 에세이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가 2015년 번역,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고,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약간의 거리를 둔다>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와 <우는 법을 잊었다>를 펴낸 가와데쇼보의 편집자 마쓰오 아키코는 경향신문과의 e메일 인터뷰에서 “와카타케는 엄마와 아내로서 가족들을 돌본 노년 여성을 그리고, 오치아이는 어머니를 7년간 간병한 노년의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여주인공은 돌봄을 끝내고 자신만의 삶을 되찾았다”며 “두 소설은 실제 일본 여성들의 삶과 겹쳐지며, 같은 세대의 독자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말했다. 두 책 모두 독자의 절반 이상이 50대 여성이다.

97세에 책 펴낸 이옥남 할머니에

박찬순도 환갑에 등단해 활약

잉엘만순드베리는 세계적 반열


한국에서도 지난 8월 97세의 이옥남 할머니가 31년 동안 쓴 일기를 엮은 책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양철북)이 출간돼 화제가 됐다. 강원도 양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할머니가 적어내린 소박하면서도 뭉클한 일기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다. 3만부가량 판매된 책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가 구매했고, 이 중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았다. 여성이란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이옥남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야 글씨 연습을 하겠다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31년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쓴 일기엔 하루하루 농사를 짓고 노동하는 이야기, 자연과 교감하며 느끼는 감동, 자식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노년에야 누리는 배움의 기쁨이 꾸밈없는 언어로 담겼다.

소설가 박찬순(72)도 환갑의 나이에 등단해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세 번째 소설집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를 출간했다. 주로 이방인과 경계인의 이야기를 써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예술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나아가 사회적 갈등과 개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스웨덴 작가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70)도 강도가 된 할머니·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등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를 통해 노년의 주체적 삶을 유쾌하게 그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올랐다. 스웨덴에서만 40만부 이상 판매되고 전 세계적으로 200만부 이상 판매됐다.

“삶은 나이가 든다고

스러져가는 게 아니라 완성 과정”

같은 세대 독자에 희망의 메시지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노년의 삶과 문학을 다룬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데는 삶이 나이가 든다고 스러져 가는 게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인 것 같다”며 “이옥남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노동을 하고 자기표현을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영경·김유진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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