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렬루…'는 정말로 사랑했건만 폭풍눈물"
존버·법블레스유·할많하않·제곧내…
요즘 10~20대 일상서 쓰는 '인싸용어'
572돌 한글날인 9일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인근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한글날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5대 국경일 중 하나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나는 매일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학교 밖보다 밥값이 싼 데다 뭣보다 JMT(너무 맛있다. '존맛탱(존X 맛탱이 있다)'의 준말)를 연발하게 하는 음식 맛 때문이다.
기자가 꿈인 나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신문과 씨름한다. 예비역 아재(아저씨)들의 집합소였던 도서관은 이제 새내기들로 북적인다. 그들 앞엔 토익책이나 공무원 참고서가 수북하다. 누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 자조했던가.
572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려인마을 바람개비 꿈터 공립지역아동센터에서 고려인 아이들이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여전히 사회 곳곳엔 나일리지('나이'와 '마일리지'가 합쳐진 말로 나이를 앞세워 권력을 행사하거나 우대받기를 원하는 사람 또는 그런 행동)가 넘친다. 내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밤에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 손님 중에도 많다. 이런 부류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법블레스유(법이 아니었으면 너는 이미 죽었다. '법'과 '블레스(bless·축복하다)', '유(you)'의 합성어)를 주문처럼 되뇌곤 한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에 꽃으로 '한글 사랑해'라는 글자가 만들어져 있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가끔 늦은 밤까지 학원을 전전하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이나 괄도네넴띤(팔도비빔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중·고등학생들을 보면 "일생가?(일상 생활 가능?)"라는 물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내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마인드를 되새기며 퇴근 준비를 한다.
편의점에선 올해 말까지만 일할 계획이다. 최저임금이 올해 시간당 7530원에서 내년 8350원으로 10.9% 오르자 사장님 부부가 "인건비 부담이 크다"며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기로 결정해서다. 40대 중반인 사장님은 나를 채용할 때부터 편의점의 비담(비주얼 담당)이라며 예뻐해 주셨다. 쇼핑몰을 운영하는 지인이 줬다며 전차스(전자파 차단 스티커)도 선물했다. 중년이지만 애빼시(애교 빼면 시체)인 사장님도 경기 불황 여파로 가게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되자 표정이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의 합성어)이 될 수밖에 없었다.
572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김동욱 서예가가 길이 120m, 폭 1.6m 크기의 광목천에 훈민정음 서문을 쓰는 서예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게다가 J는 커엽다(귀엽다. '귀'와 모양이 비슷한 '커'를 넣어 만든 말). 나는 J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덕페이스(셀카를 찍을 때 오리(duck)처럼 입술을 내미는 표정)를 보는 게 낙이었다. "예쁘면 톤그로('톤(색조)'과 '어그로(분쟁)'의 합성어로 화장한 얼굴이 너무 떠 이목을 끄는 것) 따위는 없다"는 말은 진리다. 나는 3000원짜리 밥을 먹으면서도 J에게는 밥값보다 비싼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곤 했다. J를 좋못사(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다)했지만, 끝내 고백하지는 못했다. J 옆엔 우리 학교 킹카로 불린 4학년 예비역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배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유남(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남자)이자 핵인싸(무리 속에서 아주 잘 지내는 사람. 중심을 뜻하는 '핵'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는 인사이더(insider·내부자)의 합성어)였다.
제572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열린 한글문화큰잔치 전야제에서 태권 뮤지컬 '혼' 축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J의 SNS에 "나는 문찐(문화찐따. 문화나 최신 유행에 뒤처진 사람)이 아니다"는 말을 남기고 싶어도 누군가 '누물보?(누구 물어보신 분?)'라고 악플을 달까봐 포기했다.
J와 수차례 머쓱타드(겨자 소스인 '머스터드'와 '머쓱하다'를 합친 말)한 상황이 있었지만, 끝내 난 마상(마음의 상처)만 입은 채 닭 쫓던 댕댕이(강아지. '멍멍이'에서 '멍멍'과 모양이 비슷한 '댕댕'을 넣어 만든 말)가 됐다. J를 맘속에서 떠나보내던 날, 난 밤새 롬곡웊눞('폭풍눈물'을 뒤집은 말)을 쏟았다.
한글의 특정 음절을 비슷한 모양의 다른 음절로 바꿔 쓰는 '야민정음'이 유래한 국내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국내 야구 갤러리 화면.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야민정음.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훈민정음 위로 세종대왕상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은 572돌 한글날이다. 세종 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반포(1446년)를 기념하기 위해 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이다. 법정 공휴일이지만, 중간고사를 앞둔 난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왔다. 공부하는 틈틈이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며 바나나맛 우유 한 모금 마시는 게 나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여기서 더 얘기하는 건 TMI(너무 과한 정보. 'Too Much Information'의 준말) 아닐까.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본 기사는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10~20대 젊은 층이 자주 쓰는 신조어이자 인터넷 용어인 이른바 '인싸용어' 42개를 바탕으로 허구의 20대 복학생의 일상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