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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54년 전 오늘, 14년 기다린 신금단 부녀는 7분 동안 상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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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역사 속 오늘] 54년 전인 1964년 10월 9일

일본 도쿄에서 북한 육상 선수 신금단씨와 남한의 아버지 신문준씨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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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 15년 안엔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함께 살날이 있을 테니 몸조심해”

“아바이, 잘 가오”

“몸 성히 잘 있거라. 금단아… 금단아….”


14년 만에 마주한 부녀, 두 사람의 눈물 속 상봉은 고작 7분 만에 끝이 났다. 감시원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딸은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딸을 향해 아버지는 연신 이름을 부르는 것 이외엔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비극적인 운명은 지켜보는 모든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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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부터 54년 전인 1964년 10월9일, 일본 도쿄에서 북한 육상 선수 신금단씨와 남한의 아버지 신문준씨가 만났다. 두 사람의 상봉은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둘로 갈라진 남과 북은 제3국의 이권개입 속에 서로의 체제를 비판하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1964년은 한국전쟁이 끝난지 1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렵사리 성사된 신금단 부녀의 상봉 이후 무려 21년 동안 단 한 건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성사되지 못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신씨 부녀의 간절한 바람도 영원히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신금단 부녀의 사연은 이산가족의 아픔이자 분단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다.

신금단 부녀는 왜 헤어졌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중국군과 합세한 북한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 유엔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서 물러서 서울(38선 이남) 지역까지 철수했다. 이른바 ‘1·4후퇴’다. 1·4 후퇴라는 명칭은 이듬해인 1951년 1월4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짜에서 비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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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후퇴 당시 퇴각하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따라서 북한 지역의 주민들도 대거 남쪽으로 피난했다. 함경남도 흥남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피난민의 수만 해도 10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결국 분단으로 마무리된 전쟁이 이들을 하루아침에 이산가족으로 남게 한 이유다.

신문준씨 역시 이 피난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남쪽으로 오게 된 신씨는 모든 피난민이 그러했듯, 금방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져만 갔다.

세계적인 육상 선수가 된 딸 금단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아서였을까? 가족과 헤어진 지 13년 흐른 1963년, 신문준씨는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기적 같은 일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1963년 11월10일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신생국 경기 대회(가네포) 육상 400m와 800m에서 북한 육상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이었다. 신씨는 단번에 그 선수가 자신의 딸, 금단씨라는 것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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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가 헤어진 동안 신금단씨는 세계적인 육상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신금단씨는 여러 국제 대회를 휩쓸며 세계신기록을 갈아 치웠다. 딸의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아버지는 이듬해에 열리는 도쿄올림픽에 신금단씨가 출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몹시 기뻐했다.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온 부녀가 이를 계기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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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올림픽 출전을 앞둔 신금단씨 또한 “남쪽에 살아 계실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언론에 처음으로 밝히면서 신씨 부녀의 상봉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딸을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간 일본

도쿄올림픽 개막 이틀 전인 1964년 10월8일,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일본을 찾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 상봉만을 기다린 신씨 부녀 앞에 예상치 못한 정치적 장벽이 나타났다. 딸과 만나기도 전에 북한 선수단이 올림픽을 포기하고 철수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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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은 이랬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앞서 신금단씨를 포함한 북한 선수들이 출전한 신생국 경기 대회 ‘가네포’를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며 대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생국 경기 연맹의 헌장에 ‘정치와 스포츠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명시한 부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는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한다’는 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신생국 경기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결국 국제올림픽위원회와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북한 선수단이 먼저 불참을 선언했다.

“14년 동안 못 본 딸 얼굴 한 번 보여줄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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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은 상황 앞에 아버지의 호소는 절절했다. 신문준씨의 간곡함에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신씨 부녀가 상봉할 수 있도록 주선에 나섰다. 사연을 접한 북한 선수팀의 단장 또한 이들의 만남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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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단씨가 아버지를 만난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각국의 취재진 100여 명이 몰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선수단은 이미 일본을 떠나기 위해 니가타행 열차를 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부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7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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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마주한 신씨 부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끌어안고 울었다. “엄마도 잘 있고 동생들도 다 잘 있느냐?” 먼저 말을 건넨 건 아버지 신문준씨였다. “다들 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딸 신금단씨가 흐느끼며 겨우 대답했다. 이들의 비극적인 만남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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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감시원을 의식한 듯 신문준씨가 귓속말로 딸에게 속삭였다. 신금단씨는 아무 말도 말라는 시늉을 해 보이며 “15년 안에는 통일이 될 것이고, 그때는 한 가족이 모여 살 테니 양심적으로 사세요”라고 말했다. 곧이어 북한 감시원에 의해 떨어진 부녀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잘 가오”, “몸성히 잘 있거라. 금단아… 금단아….”

14년 만에 만난 부녀는 7분여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다시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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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잠시 뒤 부녀는 상야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신금단씨가 다른 선수들과 떨어져 북한의 선수단장과 함께 역장실에서 슬픔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역에서 표를 사려다 딸이 역장실 안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 신문준씨는 역장실로 달려갔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부둥켜 안은 채 통곡하며 울었다. 그마저도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3분이었다. 부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헤어져야 했다. 신문준씨는 딸이 타고 떠난 열차 레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것이 신씨 부녀의 마지막이었다.

매년 3500여 명의 이산가족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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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 기간에 무려 11번이나 세계신기록을 경신한 신금단씨는 북한 육상 대표팀 코치와 세계선수권대회 북한 단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해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으며 북한에서 ‘인민체육인’에 올랐다. 하지만 신금단씨와 헤어져 남한으로 돌아온 신문준씨는 다시 만나자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1983년 눈을 감았다. 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2년 앞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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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한적십자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2731명 가운데 가족과 만난 사람은 모두 2746명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신청자 가운데 2.06%에 불과한 수준이다. 아울러 북쪽에 남은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산가족의 규모는 최근 4년간 매년 35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족과 헤어진 뒤 단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산가족 수는 2017년을 기준으로 7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가운데 생존자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4년에 8592명으로 전체 12.6%였던 90대 이상 초고령 신청자는 2018년 8월 기준으로 1만2061명으로 집계돼 전체 21.3%를 기록했다. 이산가족 5명 중 1명이 90대 이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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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남과 북은 앞선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개소에 합의했다. 이를 위한 면회소 시설 복구와 2007년 이후 중단됐던 화상상봉 시스템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여러 정치적 상황에 따라 급변해왔다. 이제라도 남은 이산가족 모두가 ‘제2의 신금단 부녀’로 남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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